하루에 만들 수 있는 신발 한 켤레 값은 7냥 정도로 32냥 어치의 암소가죽, 사슴 가죽, 말가죽과 못, 실 등으로 한 달에 29켤레를 만들었다. 그래서 한 달 수익금은 1백 냥 이상으로 1백 냥은 교회에 헌금하고 그 이상 되는 돈을 재료비와 생활비로 썼다.
하나님께서 가장 낮고 천했던 그를 택하셔서 연동교회의 한 알의 밀알이 되게 하셨다. 이렇게 연동교회 제1대 장로 고찬익은 모범된 장로로 기록되어 후세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었다.
연동교회는 1907년에 많은 일이 있었다. 고찬익 장로로 인해서 교회가 크게 부흥되었다. 그 해 이명혁과 이원긍을 장로로 택했다. 그러나 천민 출신 이명혁은 장로 장립을 받았고, 양반 출신인 이원긍은 장로 장립을 받지 못했다. 1909년 게일 목사는 천민 출신인 고찬익, 이명혁 장로에 이어 광대 출신인 임공진까지 장로 장립을 서두르므로 양반 교인들이 반발하였다.
특히 이 문제를 토론하러 모인 1909년 6월 25일 연동교회 제직회에는 원두우, 아펜젤러, 헐버트 등 장로교, 감리교 양 교파의 선교사들도 참석했는데 이 자리에서 행한 게일 목사의 발언에 대해 이원긍, 함우택, 오경선 등이 천민 출신의 장로 장립에 대해 심한 반발을 함으로 극한 대립이 이루어졌고, 마침내 100여 명의 교인을 데리고 분리해 나가 양반교회를 세웠으니 이것이 묘동교회이다. 교회 소재지가 묘동인고로 <묘동교회>라 하였다.
연동교회 이명혁 장로의 소유대지 210평을 매입하여 예배당을 짓기 시작했고, 이원긍을 장로로, 함우택, 오경선을 영수로 해서 10월에 당회가 조직되었는데 선교사 밀러(E. H. Miller, 密義斗) 목사가 전도 목사로, 한석진 목사가 설립 목사가 되었다.
당시 연동교회는 상류 계급인 양반 출신이 있었는가 하면 상민 출신인 중류층이 대부분이었으며 칠천 역(七賤役)에 속하는 하류 계급의 천민도 있었다. 그래서 소아회(주일학교)에서 양반의 자제들을 그들과 함께 공부시키는 것은 불가하다는 여론이 대두했고, 특히 교회의 최고 지도자인 장로 선택에 있어서 양반 아닌 상민을 세운다는 것은 수치로 생각했다.
제1대 고찬익 장로나 제2대 이명혁 장로가 과거 허랑방탕한 생활을 해 왔던 노름꾼 출신이었으며, 특히 고찬익 장로가 전도한 임공진은 갖바치이며 광대 출신이므로 그들을 장로로 세우려는데 양반들이 도저히 함께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교회의 분립이라는 위협과 비극에 직면하면서도 인간이 세운 제도나 유혹과 시험에 굴복하지 아니했다. 게일 목사의 선교 방침은 “높고 귀한데” 있지 않고 “낮고 천한데” 있었다.
함우택의 아들 함태영은 아버지를 따라가지 않고 그대로 연동교회에 남아 열심히 봉사함으로 장로가 되고 목사가 되었다.
부자가 교회로 인해 갈라진 셈인데, 법관 출신으로서 사리 판단에 지혜를 발휘한 함태영은 이원긍의 자주독립 정신에 공명하지만 교회를 분열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묘동교회 80년사>에서는 이 문제를 노골적으로 비판 거론했다.
이승하 목사<해방교회 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