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을 다녀온 사람들은 그 나라에서 노인들을 보지 못했다는 얘기를 많이 한다. 이는 사실이다. 46년 전(1975) 베트남 전쟁이 끝나고 공산통일이 되면서 남쪽 자유월남 사람들은 처참할 정도로 많이 처형되었다. 18세 이상의 청년으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약 3,000만 명 정도가 희생되었다. 베트남정부의 공식적인 기록은 800만 명 정도라고 축소해서 발표하지만 실제는 3배가 훨씬 넘는 많은 수가 죽었다고 보는 것이 진실에 가깝다. 이웃나라 캄보디아는 인구의 1/4인 200만 명을 죽였고, 중국도 공산화 과정에서 6,000만 명을 죽였다. 또한 사이공이 함락되기 직전부터 200만 명 정도가 바다를 통해 해외로 탈출했다. 살기 위해 목숨을 걸고 작은 목선을 타고 바다로 뛰어들었다. 항해하다 파도에 휩싸여 죽은 사람들도 많았다. 소위 보트 피플(boat people)로 불리어진 이들은 1975년 4월 30일 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이 공산군에 함락되기 직전부터 해외 탈출 러시를 이루었다. 공산화된 이후에도 10여 년 동안 계속됐다.
당시 인도지나 해상과 태평양 바다 위에는 목선을 타고 표류하는 배들을 많이 볼 수 있었는데 운이 좋은 사람들은 지나가는 상선에 구조되었다. 그러나 해적의 습격을 받고 죽은 사람도 많았다. 당시 우리나라 배에 구조되어 부산 임시 수용소에 수용되었던 베트남 사람들이 무려 1,000여 명이나 되었다. 대부분 미국이나 영국 호주 캐나다 등으로 망명지를 선택해서 떠났다.
1964년 통킹만 사건 이후 시작된 베트남 전쟁이 10년 동안 지속되었으나 그 결과는 끔찍했다.
분단국으로서 통일을 원했고 통일만 되면 좋을 줄 알았는데 대량학살이 진행된 것이다. 동네마다 수백 명씩 떼죽음을 당했다.
이유는 간단하다.『자유 민주 자본주의 체제』에서 살았다는 것 때문이다. 공산주의 이념과 반대되는 사상을 갖고 자본주의 사회구조 속에서 살아왔으므로 그들의 정신구조를 공산주의 이념체계로 싹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베트남의 고위층은 말할 것도 없고 공무원, 교사, 군인, 경찰, 종교지도자, 변호사, 경제인, 문화인, 언론인, 대학생 등 자본주의 색체가 묻어있는 사람들은 집단처형이나 인간개조를 위한 강제수용소로 보내졌다. 생지옥 같은 곳에서 2-3년 지내다 보면 살아나오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 떼죽음을 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기성세대만 죽이는 것이 아니라 젊은이들까지 죽였다. 10대 후반으로부터 70대 노인까지 전부 끌어다가 강제 수용소에 집어넣고 희생시키다 보니 베트남에서는 갑자기 ‘1세대 반’의 인구가 사라졌다. 전쟁은 46년 전에 끝났지만 그 후유증은 오늘날까지 남아 베트남에는 노인들이 없게 된 것이다. 노인이 없다보니 인구도 많이 줄었다. 패망하기 전 1억 2천만 명이던 인구가 지금은 9,800만 명이다. 46년간 계속 낳아도 줄었다. 인류의 대 재앙이다.
한편 통일은 됐으나 살 길이 막막했던 공산 정부는 미국과의 적대관계를 풀고 개방정책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도이모이(Doi Moi)’ 정책이 바로 가난했던 베트남을 살리는 대 전환점이 됐다. 1986년 베트남공산당 제6차 대회에서 가난을 극복하기 위한 대혁신정책이 채택된 것이다. 도이모이 정책 이후 세계의 자본이 베트남으로 몰려들기 시작했고, 지금은 아시아의 떠오르는 별로 지칭될 만큼 경제적으로 크게 성장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2021년 현재 9,000개 이상의 기업이 베트남에 진출해 있다.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던 자유베트남이 한 순간에 패망하게 된 것은 ①국론 분열 ②정부의 무능과 권력형 부정부패 ③군부의 부정부패 ④공산첩자들의 정부요로 장악 ⑤공산당의 집요한 심리전 ⑥특히 파리 ‘평화협정’을 미국이 믿었기 때문이다. 공산당과의 조약이나 협정은 절대 믿어서는 안 된다(휴지조각에 불과하다)는 역사적 교훈을 몰랐기 때문이다.
베트남을 여행하는 사람들은 자연과 오토바이 행렬에만 관심 갖지 말고 ‘노인이 없는 나라’의 슬픈 사연과 베트남 패망의 원인과 결과에 대한 역사적 진실도 함께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다.
배영복 장로<연동교회>
• 한국예비역기독군인연합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