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과 지혜] 난세에 어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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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이후 교회는 수난의 연속이었다. 특별히 1937년부터는 일제가 노골적으로 신사참배와 창씨개명을 강요하였고, 1938년 제27회 장로회 총회는 치욕적인 신사참배를 결의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교회는 예배 시작 전에 신사참배, 궁성요배, 황국신민서사 제창을 해야만 했다. 일제는 1940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를 해산시키고 외국 선교사들을 전원 추방하였다. 일제는 한국교회의 성직자들을 신궁 건설에 부역하게 하였으며, 1941년 태평양전쟁 도발 후에는 각 교단의 해산 및 통합을 강제 추진하였다. 일제는 여기에 더하여 1944년에는 주일과 수요일 밤 예배를 폐지하기에 이르렀다.

1945년 한국은 독립을 맞이하였다. 그러나 민족은 남북으로 나뉘었고 이어진 6.25전쟁을 통하여 교회는 파괴되었다. 장로교 내부의 분열과 싸움도 이어졌다. 우여곡절 끝에 1952년 고려파가 분열되었다. 1948년에는 박형룡 목사를 중심한 장로회신학교가 조선신학교와 별도로 설립되었다. 1951년 제36회 총회는 조선신학교와 장로회신학교의 인가를 모두 취소하고 총회신학교를 새로 설립하여 개편을 꾀하였다. 그러나 1952년 제37회 총회에서 김재준 목사가 제명 처분된 것을 계기로 그 이듬해인 1953년에는 기장 총회가 예장으로부터 분리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이 난세에 한국교회를 구하기 위한 지도자들이 대거 출현하였다. 정치적으로는 이승만, 안창호, 조만식 등이 활동하였고, 삼일운동에는 길선주, 이승훈 등이 주도적으로 가담하였다. 이성봉, 김익두, 최권능 목사 등의 부흥회 운동도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 박형룡, 김재준 같은 빼어난 학문을 자랑하는 학자들도 있었다. 그리고 고귀한 신앙의 절개를 지키며 죽어간 주기철, 손양원 목사와 같은 순교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교회는 또 다른 면에서 영웅을 필요로 하였다. 바로 한국교회 전체를 덕으로 아우르면서도 질서와 법을 세워 교회와 노회와 총회의 기강을 바로잡는 일이었다. 이자익 목사는 후배였던 한경직 목사와 더불어 이러한 면에서 한국교회를 위한 최고의 적임자로 쓰임을 받고 존경의 대상이 되었다. 이들이 어른으로 있을 때 한국교회는 고난 속에서도 희망이 있었다.

공권력에 의해 예배가 제한받고, 교회가 코로나바이러스의 온상처럼 누명을 쓰고, 교회 출석하는 것이 죄가 되고 있는 이 난세에 교회의 구심체 역할을 감당할 존경받는 어른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비극이다.

문성모 목사
<전 서울장신대 총장•강남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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