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방은 <할레마노아(남자들의 전당이라는 하와이 말)>라는 이름을 가진 13층 건물의 11층이었다. 내 방에서 내려다보이는 호놀룰루의 풍경은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그림엽서에서나 볼 수 있는 다이아몬드 헤드를 굽어보고 있으면 그 밑으로 지상의 낙원이라고 불리는 와이키키 해변이 나른하게 누워 있는 여인의 나체처럼 투명하게 보였다. 기숙사 뒤쪽으로는 곱게 깎인 잔디가 구릉을 이루고 있었는데 스프링클러가 신기하게 원을 그리며 물을 주고 있었다. 건너편에 <할레쿠와히네(여자들의 전당이라는 하와이 말)>라는 여자 기숙사가 보이고 그 중간에 남녀 학생들이 휴식할 수 있는 제퍼슨 홀이 자리 잡고 나직이 서 있었다. 나는 그곳 제퍼슨 홀의 널찍한 의자에 앉아서 중앙으로 천장이 뚫린 이 홀의 이 층에 40여 개 외국 국기가 걸려 있는 것을 보면서 기전학교의 이동수업 광경을 회상하였다. 어망에 잡힌 고기들처럼 우글대던 기전학교에 비해 이 홀은 사치스럽게 넓었다. 이 광대함, 이 부유함, 이 여유…. 이것은 기를 죽이는 일이었다. 조무래기 새들이 민주주의 어쩌고 하면서 자기들을 다스릴 왕을 뽑자고 할 때 큰 독수리 한 마리가 억센 발톱을 보이면서 “너희들은 이런 발톱이 있어?” 하고 호통을 치는 격이었다. 동창생도 친구도 없던 나는 무료한 오후를 의자에 앉아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새로운 문화에 적응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이것은 불신사회에서 기전학교의 신앙공동체로 뛰어든 것보다 더 심한 충격이었다.
미국에 와서 두 번째로 힘들었던 것은 향수병을 이겨내는 일이었다. 문화적 충격에 못지않게 하와이 특유의 감미로운 낭만은 홈씩을 가져왔다. 주말에 와이키키 해변으로 나가려면 아예 숙소에서부터 해수욕복 차림으로 차를 타고 나가는 것이었다. 어떤 한국 학생은 비행기 소리만 나도 갑자기 집이 그리워져 두드러기가 난 것처럼 내장이 가려워지고 미칠 것같이 된다고 했다. 거기다 EWC는 주말마다 여흥 프로그램을 계속 제공하고 있었다. 우쿨렐레(UKULELE: 만돌린 같은 하와이 악기) 강습과 훌라춤 강습, 하와이의 노래, 사교춤 강습 같은 것들이 그중의 하나였다. 하와이의 노래는 어느 것이나 감미롭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때 하와이 출신 가수로 유명했던 단호의 <진주조개>는 말할 것도 없었거니와 <하와이 결혼 찬가>, <해변 저 멀리> 이런 노래도 하와이 특유의 감미로운 음률이 넘치는 것이었다. 훌라춤은 버들가지처럼, 또 흐르는 물을 보는 것처럼 온몸이 유연했다. 어떤 남학생은 허리와 엉덩이가 따로 노는 것 같은 훌라춤에 매료되어 저도 모르게 그 곁에 가서 엉덩이를 정신없이 쳐다보다가 뭘 보느냐는 호통과 함께 탐스러운 엉덩이로 떠밀어서 엉덩방아를 찧은 일도 있었다. 호놀룰루가 있는 이 오아후섬은 공부하는 곳이 아니고 관광의 도시였다. 달콤한 설탕수수와 파인애플 사이에 끼어 관광객이 정신이 몽롱해져서 돌아가는 그런 도시 같았다. 내가 꿈꾸던 유학이 이것이었는가? 집에 두고 온 가족들이 문득문득 그리워져 견딜 수가 없었다. 이런 향수병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해소되어갔다. 아내를 데려올 절차를 밟거나, 교회에 나가거나, 술집을 들르거나, 외국 이성에게 데이트를 간혹 신청하거나 하는 방법이었다. 몇 주일이 지난 뒤 아내에게서 편지가 왔다.
1966.07.15.
주 은혜 안에 평안하신 모습 사진으로 뵙고 정말 반갑고 기뻤습니다. 당신은 아주 젊어 뵈더군요. 일 개월 동안에 젊어지기 공부만 하셨나 보죠? 좀 이국적인 인상까지 하는 모습 아주 귀여운 15, 6세 미소년 같았습니다. 지희가 “아빠가 더 예뻐지셨다. 미국 가면 다 예뻐지나 보다”라고 하더군요. 그러나 너무 좋아하지 마십시오. 저는 당신이 예뻐지는 것도 싫답니다. 화요일엔 애들에게 그림엽서를, 그리고 금요일엔 저에게 꼭꼭 편지가 왔었는데 이번에는 사진을 보내느라 늦어졌겠지만, 편지가 늦어 정말 맥이 빠져서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지난주에는 박 장로님이 대예배 때 당신을 위해 기도해 주셨습니다. 당신도 우리 가정과 교회를 위해 꼭 기도해 주셔요.
오승재 장로
•소설가
•한남대학교 명예교수
•오정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