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 믿음으로 한국 땅에 뛰어든 배위량 목사 (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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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에서 상주까지 (34)

김재수(金在洙)로 불리던 김기원(金基源)이 언제 왜 김기원(金基源)으로 개명했는지는 확인이 되지 않지만 그는 대구제일교회와 김천송천교회 교회와 깊은 관련이 있는 인물이다. 대구제일교회와의 연관은 그가 안의와 선교사와 1897년 7년 봄에 대구 선교부에 부임하여 안의와를 도와 대구에서 선교사업에 함께 참여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는 대구제일교회 최초의 조사였다. 즉 그 말은 김재수가 대구 경북지역의 최초의 시무 조사였다는 의미이다. 『대구제일교회 90년사. 1893년 창립』는 대구제일교회 최초의 역사를 이렇게 기술한다.
안의와 목사는 교회를 조직했다. 교인은 안의와 선교사, 장인차 의사, 김재수 조사 및 학습교인 서자명, 정완식 씨 등 7명이었다. 이것이 창립 당시의 제일교회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창립 당시의 다음과 같은 당회록이 남아 있다.

第一會
一千八百九十八年 十二月 十八日
긔도로 본회를 개회하다.
안의와 목사와 김재수 조사가 참석하다.
서면욱(徐勉煜)(徐子明씨를 가리킴)과 덩완식(鄭完植) 兩人이 學習問答하여 밋음과 決心한 증거 만족함으로 학습인으로 세우기로 결졍하야 다음 주일에 학습세우다.
書記 안의와

대구제일교회의 최초의 당회록에 김재수의 이름이 조사로 올려져 있다. 김재수에 대하여 대구 경북지역의 향토 사학자였던 이재원은 『대구장로교회사연구』에서 아래와 같이 기록한다.
애덤스 목사와 같이 대구에 온 어학선생 金在洙는 부해리 목사의 증언으로는 상주 출신이다. 그는 1854년 11월 3일 경북 상주군 낙동면 화산리에서 출생하여 8세에 상주군 화산리 私塾에서 수학하였고, 18세에 조승장과 결혼하여 2남을 두었다.
선산 구미 상모동 출신이라는 설도 있었으나 이것은 그가 선산 구미 상모교회를 담임한 사실에서 비롯된 말인 것 같다.
김재수는 젊은 시절 가슴에 심한 종창을 앓던 중 부산선교부에 용한 의사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1891년에 걸어서 부산 선교부를 찾아갔다. 그곳에서 하디 의사(하리영, Dr. R. A. Hardie)를 만났으나 고칠 수 없다는 진단을 받고 큰 실의에 빠졌다. 하디 의사는 캐나다대학 선교부의 후원으로 1890년부터 부산에서 의료 선교 사업을 하고 있었다. 하디 의사는 실망한 김재수에게 예수를 믿도록 전도하여 세례를 받도록 만들었다. 그에게 세례를 준 사람은 부산 선교회의 손안로 목사(Rev. Andrew Adamson)로 알려져 있다. 제일교회에 접수된 이명증서에는 그에게 세례를 준 목사는 ‘빅토리아 장로교 손목사’라고 적혀 있다. 세례교인이 되어 고향에 돌아온 김재수는 문중에서 많은 핍박을 받았다. 그러고 있던 중 1894년에 베어드 목사가 상주에 들렀을 때 그는 베어드 목사를 따라 부산으로 내려갔다.
다음 해(1895年) 5月에 그는 그곳에서 애덤스 목사(안의와, Rev. James E. Adams)를 만나게 된다. 애덤스는 한국에서 선교하기 위해 그의 누나가 이미 와 있는 부산을 선택했던 것이다. 이때 김재수는 베어드의 소개로 애덤스의 어학선생(language teacher)이 된다. 애덤스 목사가 1897年 가을 대구 스테이션의 선교사로 부임할 때 그는 애덤스의 어학선생 신분으로 동행했다. 그는 남문안 선교기지 안에서 같이 살면서 전도서적을 팔고 같이 순회전도를 다니는 동안 자연스럽게 애덤스의 조사(助事 helper)가 되었다. ‘90년사’는 그가 대구에 올 때의 신분을 통역자로 기록하고 있으나 그의 영어실력이 통역을 할 수 있는 정도의 수준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는 훗날 이름을 김기원(金基源)으로 개명했다. 그 시기는 언제인지 미상이다.
향토사학자 이재원은 그 김서방이 김재수이고 그 김재수는 안의와와 함께 대구에 들어와 안의와의 어학선생 겸 조사로서 대구제일교회의 첫 조사가 된 인물임을 밝히고 있고, 그는 대구 경북지역의 첫 목사가 되었던 그 김기원인 것을 유추할 수 있게 한다. 그러나 더 명확한 것은 후세의 교회 역사학자들이 해야 할 일인 것 같다. 그래서 이 문제는 더 이상 확대하지 않기로 한다. 그것은 비역사학자인 필자의 역량 밖의 문제이고, 필자의 중요한 관심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배위량은 김재수를 낙동에서 상주로 가는 길에 찾아가서 만났다. 그 김재수는 종기 때문에 상주 낙동에서 부산까지 걸어서 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갔지만, 그 병을 고치지 못했다. 그렇지만, 부산에서 전도를 받아 예수를 믿게 되었던 인물이고 고향 상주로 돌아와 요양하던 차에 제2차 순회전도를 나온 배위량이 그 김재수를 찾아가게 됨으로 김재수가 역사에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그 당시에 무수하게 많은 사람들이 부산 선교부로 가서 병을 치료했을 것이고, 한문학교와 사랑방에 드나들었을 것이지만, 역사에 드러난 인물은 많지 않다.
이재원은 김재수가 “1854년 11월 3일 경북 상주군 낙동면 화산리에서 출생하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배위량이 상주로 가는 길에 김재수를 찾아갔던 날이 1893년 4월 27일 목요일이었으니, 김재수의 만 나이가 38세일 때이다. 1893년 4월 27일 목요일 오전에 상주 낙동을 출발한 배위량은 상주가는 길에 김재수를 찾아갔다. 이재원이 김재수가 “1854년 11월 3일 경북 상주군 낙동면 화산리에서 출생하였다.”라고 했던 근거를 알 길이 없다. 하지만, 이재원의 주장은 상당한 파급력이 있어 교회 사가들은 거의 모두 이재원이 이러한 주장을 따르고 있다.
배위량이 상주 낙동 어디서 하룻밤을 묵었는지 그 장소를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아마도 나루터가 있었던 낙동의 어느 주막에서 잠을 잤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2018년 12월 26일(수요일)에 <배위량 순례단; 단장: 배재욱 교수>과 <영남신학대학교 배위량 순례단 동아리(평화); 지도교수: 배재욱; 회장: 우성화[영남신대 신대원학생]> 연합으로 상주시 낙동면 일대를 탐방하면서 낙동리와 화산리 그리고 신상리 일대를 탐방하면서 배위량 순회전도 여행길 탐방을 했다. 배위량이 하룻밤 잠을 잤던 낙동에 왔다는 사실만으로도 순례단원들은 중요한 걸음을 한 것이었다. 성탄절 예배를 각자의 처소에서 드린 후 그 이튿날 영남신학대학교 교정에 모여 상주시 낙동면으로 출발했다. 배위량이 1893년 4월 26일 수요일 밤에 하룻밤을 유숙하면서 일기를 써서 남긴 그 낙동을 찾아 왔다는 것에 대하여 순례단원들과 순례단 동아리 회원들은 매우 감격해했다. 낙동을 돌아본 후 우리는 김재수(김기원) 목사의 고향으로 알려진 낙동면 화산리로 가서 김재수의 생가를 찾고자 했다. 필자가 배위량 순례단을 이끌면서 배위량 순회 전도길을 따라 걷고 그 길을 개신교 순례길로 개척하기 위하여 노력하면서 해마다 배위량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에서 길 위의 학술대회를 베풀었다. 그런데, 그렇게 순례를 하고 학술대회를 베풀고 한다는 소문을 듣고 경서노회 상주시찰 신봉교회 시무하는 김재수 장로님께서 어느날 “상주에 순례를 나오면 꼭 한번 뵙고 싶다”는 말씀과 함께 연락이 왔다. 그래서 그 이야기를 기억해 두었다가 상주 낙동을 방문하고자 할 때 김재수 장로에게 연락을 한 후 낙동 나루터와 배위량이 김재수 조사를 만났던 낙동면 화산리를 방문하고자 한다는 연락을 드렸다.

배재욱 교수

<영남신학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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