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 믿음으로 한국 땅에 뛰어든 배위량 목사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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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에서 상주까지 (42) 

배위량 순례길은 상주시에서 낙동강의 나루터가 있는 낙동에서 시작된다. 배위량은 1893년  4월 27일 목요일에 상주로 갔다. 그리고 5월 1일(월요일)에 예천 용궁에 도착했다. 낙동에서 상주로 가서 그곳에서 며칠을 묵은 후 예천 용궁으로 갔다. 1893년에 배위량은 상주에서 예천 용궁으로 갈 때 상주 사벌국면과 예천 풍양면을 거쳐 삼강을 거쳐 용궁으로 갔을 것 같다. 그러면 먼저  오랜 역사를 간직한 상주의 지리와 역사에 대한 일반적인 개관을 살펴보자.

국립공원 속리산에 속하는 문장대는 상주시 화북면 장암리에 위치한 해발 1,054m의 산정상에 있는 큰암석으로 이루어진 석대인데, 그 위에 한꺼번에 50여 명이 앉을 수 있다. 속리산 문장대에서 흘러내리는 물은 세 갈레로 갈라져 동쪽으로 흘러내려가는 물은 낙동강을 이루고, 남쪽으로 흘러내린 물은 금강을 이루고, 서쪽으로 흐러 내리다가 북쪽으로 다시 꺾어져 내리는 물은 달천(川)이 되어 나중에 남한강으로 흘러든다. 이런 점에서 보면 상주는 큰 산과 함께 큰들, 그리고 큰 강인 낙동강과 어우러져 형성된 넓은 터전 위에 구석기부터 사람이 살았고, 고대국가인 사벌국(沙伐國) 또는 사량벌국(沙梁伐國)’이 세워졌던 역사와 문화적으로 중요한 지역이다.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소국 사벌국은 다른 소국처럼 연합과 탈퇴를 반복하면서 생명을 이어간 것 같다. 다음은 사벌국에 관한 『삼국사기』의 언급이다. 

『삼국사기』석우로전(昔于老傳)에 의하면 “사벌국은 이전부터 신라에 속하여 있었으나 첨해이사금대 갑자기 배반하여 백제에 다시 속하자 우로(于老)가 군대를 거느리고 이를 토벌하여 멸하였다.”고 한다. 「지리지」 ‘상주조(尙州條)’를 보면 “첨해왕 때에 사벌주를 취하여 주(州)를 설치하였고, 법흥왕 11년 처음으로 군주(軍主)를 두고 상주로 삼았다가 진흥왕 18년 주를 폐하였다. 신문왕 7년 다시 주를 설치하고 성을 쌓으니 주위가 1109보였다. 경덕왕 16년에 이름을 상주라 하였다.”고 한다. 제14대 유례왕대에는 사도성(沙道城)을 개축하고 사벌주의 호민(豪民) 80여가를 이주시키기도 하였다.

상주는 경상북도 북동쪽에 위치하여 경상북도의 다른 시군들과 충청북도와 경계를 맞대고 있다. 상주시는 경상북도 김천시, 구미시, 의성군, 예천군, 문경시 그리고 충청북도 영동군, 보은군, 옥천군 그리고 괴산군과 경계를 접하는 큰 지방 행정 단위의 지자체이다. 사람들은 보통 충청북도 보은에 속리산이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것은 충청북도 보은군에 있는 정이품송에 대한 학습효과 때문이라고 본다. 속리산은 충청북도 보은군과 경상북도 상주시 사이에 있는 산이다. 

통일신라시대 때인 경덕왕 16년(757년)에 상주의 이름이었던 사벌주가 상주(尙州)로 개칭되고 혜공왕 12년(776년)에 상주는 1州 10郡 30懸을 관할하는 지방행정기관이었다. 상주시 홈페이지는 아래와 같이 상주의 역사를 기술한다.

상주에 소속된 郡懸은 오늘날 낙동강 상류지역인 안동시 임하면 일대를 경계로 서쪽으로는 영주시 일부, 청송군 일부, 예천군, 문경시, 의성군, 군위군, 김천시 일부, 충북의 청원·보은·옥천·영동·황간 일대가 관할에 속하였다.

주(州)의 長官 명칭은 종래의 군주에서 총관, 도독(都督) 등으로 개칭되었는데 오늘날의 道에 해당되었고 郡에 太守, 懸에 令을 두어 중앙관리가 배치되었다. 신라의 지방제도는 행정적 의의와 함께 군사적인 의의도 매우 중요시되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상주는 옛부터 지방행적의 중심이었다. 동쪽으로 예천군·의성군·구미시, 서쪽으로 충청북도 보은군·옥천군, 남쪽으로 김천시, 충청북도 영동군과 그리고 북쪽으로 문경시, 충청북도 괴산군과 경계를 접하고 있다. 

상주가 역사적으로 지리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었지만, 1945년 이후에는 도시화 과정에서 소외된 지역이 된 것을 상주시 홈페이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정치·경제·군사 등의 중심지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이것은 산업화 및 새로운 교통수단인 철도망이 우리 지역을 비켜가게 되었고, 낙동강을 이용한 水運 역시 그 역할을 철도에 넘겨주었으며, 상공업 발달에 따른 농업지역으로서 남게 된 것이 낙후의 요인이었다.

현재 상주는 1개읍 17개면 6개동으로 이루어진 면적이 넓은 도농복합도시지역으로 동서 간의 거리가 48.3㎞이고 남북 간 거리는 49㎞나 되는 큰 지역이다. 

상주에서 배위량은 <4월 28일 금요일 오전, 상주>에서 다음과 같은 일기를 썼다.

우리는 어제 오전에 낙동을 출발하였다. […].

우리는 어젯밤 낙동에서 40리 떨어진 상주에 도착했다. 마부 한사람이 몸이 안 좋아 낙동에 남겨두었다. 우리와 함께 여행하는 소년의 건강 상태도 점점 안 좋아진다. 부산을 떠나 여기까지 온 상황에서, 일행 중 한 사람이라도 건강이 안 좋을 경우 많은 문제가 야기된다. 모든 것이 잘되기를 바랄뿐이다. 어제는 비교적 괜찮은 하루였다. 우리는 쉴 수 있는 방을 겨우 얻었고, 오늘 오전에는 책을 판매하고 있는 중이다. 

위의 배위량의 일기에 보면 낙동에서 상주로 올 때 마부 2명 중에서 한 명이 몸이 안 좋아 낙동에 남겨두고 왔다는 것을 말하면서 당시에 순회전도단의 열악한 형편을 말하고 있다. 현대 시대에도 여행 중 누가 병들면 여러 가지 애로가 많은데, 모든 것이 불편했을 1893년 당시야 말해 무엇을 하겠는가? 그래서 배위량은 “부산을 떠나 여기까지 온 상황에서, 일행 중 한 사람이라도 건강이 안 좋을 경우 많은 문제가 야기된다.”고 했다. 그리고 그도 당시에는 한 외국인에 불과한 젊은이였지만, “모든 것이 잘되기를 바랄뿐이다.”라는 희망을 붙잡고 있다는 점에서 현대인과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문화가 발전하고, 과학이 발달했다 해도 인간은 한계 안에서 살아가는 존재인 것 같다. 달과 별들에게까지 진출하는 시대이고 한 자리에 앉아서 천리만리 밖을 살피는 시대에 살지만, 여전히 인간은 무지하고 내일을 단지 예측할 뿐이지 정확하게 아는 것이 제한되어 있다.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COVID-19)가 이토록 온 인류를 괴롭히고 주눅들게 하리라고 아무도 예측하지 못하였다. 문화와 과학이 발전했다 하더라도 인간은 여전히 한계 안에서 살아간다는 점에서 피조물이다. 이러한 피조물의 한계 안에서 살아가는 존재이기에 인간은 늘 불안을 안고 살아가는 존재이다. 이 점에서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인식해야 한다. 그 한계치를 상정하지 않고 살아간다 해도 인간은 한계 안에서 살 뿐이다. 배위량은 자신의 한계를 일찍 깨닫고 한계가 없으신 하나님의 무궁하심을 의지했고 그 분의 부름을 청종하여 고난의 행진을 기쁨을 받아들여 미지의 조선으로 건너와 자신이 만난 하나님을 소개하기 위하여 분투한 인물이다.

배재욱 교수

<영남신학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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