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 믿음으로 한국 땅에 뛰어든 배위량 목사 (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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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에서 상주까지 (47) 

이상규의 번역본에 나타나는 배위량의 일기에는 리차드 베어드가 1968년에 편집한 William M. Baird of Korea : A Profile에는 나타나지 않는 상주의 지리적인 위치에 대하여 세밀한 설명이 아래와 같이 첨가되어 있다.

상주는 부산에서 480리 떨어진 곳이고, 서울에서의 거리도 동일하다. 그러나 서울에서의 길이 훨씬 좋다. […] 그곳은 넓은 평원에 위치해 있고, 그 주변은 많은 마을들로 둘러싸여 있다.

“Sang Joo is 480 li from Fusan and the same from Seoul, but had a better road to Seoul. […] It is situated in a large plain and surrounded by a good number of villages.”

장티푸스에 감염되어 1931년 11월 28일 평양에서 죽음을 맞이한 배위량이 1946년 8월 15일 이후에 다시 부활하여 ‘한성(또는 한양)’을 서울로 지명 변경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그가 선견지명이 있어 조선 말기의 어수선한 상황이지만, 조선이 일제의 억압으로부터 독립할 것이고 한성의 지명이 서울이 될 것이라고 예측하여 서울이라고 표기한 것도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배위량이 나중에 자신의 순회전도 여행에 대한 일기를 정리하면서 그 일기를 수정하고 보완했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것이 부분적으로는 맞을 수도 있지만, 다는 아닌 것 같다. 그것은 역사적으로 그리고 기적으로 맞지 않는 말이다. 

누구든지 어떤 글을 쓰게 되었을 때, 자신이 쓴 글이 마음에 들지 않든지 틀린 것이 있다면 수정을 하고자 한다. 수정을 하면서 더 좋은 글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수정을 하면서 자신의 사관(史觀)이나 신학(神學) 또는 사상(思想)이 바뀐 입장에서 글을 고쳐서 쓸 수도 있어 수정본이 항상 옳다고도 혹은 맞다고 하기가 쉽지 않다. 그것은 오타 수정이나 혹은 잘못 기재한 정보를 수정하는 것은 모르지만, 어떤 대상을 더 자세하게 설명한다고 하면서 더 정확한 정보를 확보하여 수정할 때도 있지만, 그렇지 못할 때도 있다. 배위량이 제2차 순회전도여행을 했던 1893년은 조선 말기인데, 그 때에는 아마도 배위량이 참조할 수 있도록 경상도 내륙지역에 관하여 기록된 역사, 지리와 문화에 관한 영어 책이 전무했을 것이다. 지금은 어느 지역, 예를 들어 상주의 역사, 문화 그리고 지리에 대한 글을 쓰고자 하여 도서관에 가서 책을 찾으면 여러 저자들이 쓴 책이 부지기수로 많다. 그러나 자신에게 맞는 내용이 들어있는 책을 찾기가 쉽지 않다. 물론 상주 시청에 직접 가서 상주에 관하여 기록한 문헌들을 찾아서 읽는 것이 가장 정확하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원자료에 불과하다. 그 원자료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는 해석자 개인의 책임이다. 그것은 어떤 것을 어떤 사관, 사상 또는 시각으로 읽고 해석하기에 따라 다를 수 있기에 그렇다. 가령 배위량이 <일기 2차본>에서 “상주는 부산에서 480리 떨어진 곳이고, 서울에서의 거리도 동일하다. 그러나 서울에서의 길이 훨씬 좋다.”고 했는데, 배위량은 그때까지 부산에서 한성까지 왕래한 적은 아직 없었다. 그리고 그가 부산에서 상주까지는 제2차 순회전도 여행을 하면서 길을 경험했기에 그 길이 어떤지를 알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배위량은 그 때까지 상주에서 한성까지는 여행한 적은 없었다. 그러므로 그가 상주에서 한성까지 얼마나 먼지 얼마다 그 길이 험한지 등등 지리적인 정보를 대충 짐작으로도 알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가 어디서 그런 정보를 얻었을까? 배위량은 상주에서 한성까지 가는 길을 그 때까지 아직 여행하지 않았고 그 이후에도 그가 그런 여정을 공식적으로 여행했다는 기록이 없다. 그는 그 길을 가보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는 부산에서 상주까지의 길의 더 좋은지 상주에서 한성까지의 길이 더 좋은지를 몰랐을 것이고, 그것에 대하여 관심을 크게 두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일기 2차본>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기록한다. 

상주는 부산에서 480리 떨어진 곳이고, 서울에서의 거리도 동일하다. 그러나 서울에서의 길이 훨씬 좋다. […] 그곳은 넓은 평원에 위치해 있고, 그 주변은 많은 마을들로 둘러싸여 있다.

한성을 ‘서울’이라고 개칭한 것은 1946년 8월 15일이다. 이 사실과 관련하여 위의 글을 읽으면서 드는 의문은 다음과 같다. 

1. 위의 글은 <일기 1차본>인 리차드 베어드의 William M. Baird of Korea : A Profile에는 나오지 않는데, 그렇다면 원본에 나오지 않은 내용을 과연 누가 썼을까? 

 

배위량인가? 아니면 후기 필사자인가? 만약 배위량이 위의 글을 썼다고 가정한다면, 그의 아들인 리차드 베어드가 자기 아버지 일기를 편집할 때까지 그가 구할 수 있었던 것이 일기 원자료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편집하여 출판한 것이 <일기 1차본>이었다. 그렇다면 위의 글은 수기 일기인 <일기 2차본>에는 위의 글이 들어 있다. 그렇지만, 그 대필한 일기의 정확한 생성연대를 알 수 없다. 그런데 위의 인용구에서처럼 수정을 가한 흔적, 즉 ‘한성→ 서울’,이 있고 그 수정 흔적은 아무리 앞으로 당겨도 1946년 8월 15일 이후일 것이다. 그렇다면 배위량 사후 15년 정도 지난 시기에 그런 수정이 가해 졌을 것이다. 

배위량은 숭실대를 창립하여 한국인들을 위한 대학 교육에 힘쓰다가, 숭실대학에서의 일을 그만 둔 후 한국어 성경 번역에 매진하다 장티푸스에 걸려 예기치 않게 죽음을 맞이한 인물이다. 그런 그가 해방 후 ‘한성’이 ‘서울’로 개칭될 것을 미리 내다보고 ‘서울’이란 지명을 사용했을리는 만무하다. 그렇다면 어느 대필자가 배위량의 일기를 원본으로 하여 2차본을 대필(代筆)하면서 위의 글을 덧붙여 설명을 했을 것이다. 이 경우에 그 대필자가 “상주는 부산에서 480리 떨어진 곳이고, 서울에서의 거리도 동일하다. 그러나 서울에서의 길이 훨씬 좋다. […] 그곳은 넓은 평원에 위치해 있고, 그 주변은 많은 마을들로 둘러싸여 있다.”라는 말을 덧붙였을까?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이 인용구에서 ‘서울’이란 지명만 없다면 배위량이 직접 1893년 4월-5월에 순회전도 여행 중에 기록한 자신의 일기를 다시 정서하면서 덧붙여 쓴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그 때 배위량은 ‘한성’이라고 기록했을 것이지만, 그 후 어느 인물이 ‘한성’을 ‘서울’로 고쳐 적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가정이 성립되기 위해서 “리차드 베어드가 왜 그런 사실을 모르고 <일기 1차본>을 편집했을까?”란 질문에 대한 답이 먼저 나와야 한다.  

<일기 1차본>에 위의 인용구가 나오지 않지만, <일기 2차본>에는 나오는 내용에 상주의 지리적인 정보를 담고 있다.

1. 상주는 부산에서 480리 떨어진 곳이고, 서울에서의 거리도 동일하다. 

2. 그러나 서울에서의 길이 훨씬 좋다. […] 

3. 그곳은 넓은 평원에 위치해 있고, 그 주변은 많은 마을들로 둘러싸여 있다.

당시 배위량은 상주에서 예천을 거쳐 안동으로 갈 여정을 준비하고 있었기에 자신이 가고자 하는 목적지로 향하는 여정에 더 관심을 가졌을 것이다. 그런데 위에서 보다시피 1-2는 상주에서 서울로 향하는 길에 대한 관심을 포함하고 있고 3은 상주에 관한 지리적이 관심이 들어 있다. 이런 점에서 필자는 1-3의 글은 배위량이 직접 쓴 글이 아니라 2차 생성자, 즉 배위량의 일기 원본을 대필했던 익명의 인물이 대필하면서 덧붙이고 수정을 가한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고 본다.

배재욱 교수

<영남신학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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