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살던 고향은 충북 청원군 옥산이란 곳이다. 구슬옥 뫼산, 낮고 작은 산들이 구슬을 꿰어 놓은 것 같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강 건너 이웃 사인교회에 고 김진안 목사님이 당회장으로 미조직 교회인 옥산교회 호죽교외 덕촌교회에 오셔서 1년에 한두 차례 성례식을 거행하여 주시곤 하셨다. 5km든 10km든 십리라 하였든 주위에 국사교회 신대교회 신촌교회가 있었다. 자체적으로 부흥회를 개최할 수 없었던 교회들은 주위에서 부흥회를 한다면 멀고 가까움에 상관 않고 무리지어 참석하였다. 집회 기간은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꼬박했으며 사례는 거의 자비량 수준이었다.
지금은 새벽예배 인도도 사라져가고 낮, 밤 5시간 정도로 마치며 강사 사례는 본 교회 담임목사의 사례에 준하여야 할지를 고민한다지 않는가? 어느 부흥강사의 본 교회 장로가 사례금 중 십일조를 바치자 종이 나가서 수입이 생기면 주인에게 다 주어야 된다고 주장하여 본 교회에 소홀히 하는 것을 막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부흥회 하기 전 은혜를 구하는 철야 및 준비 기도회를 가지고 이웃 교회에 알리고 본 교회 교우들은 외출을 삼가고 휴가를 이날을 위하여 사용하였다.
참석한 이웃의 교우들은 찬양을 고집하여 예배를 돕고 이불을 싸들고 친인척 집이나 교회에서 기숙하면서 은혜와 치유를 원하며, 방언이 터지고 치유의 은사가 끊이지 않았다. 6.25전쟁으로 인한 공포의 폐해와 기아에 허덕이던 당시 동리에 미친 (귀신들린) 사람이 더러 있었다. “마귀들과 싸울 지라” 찬송과 주기도문 만으로도 입에 흰 거품을 뿜어대며 며칠 기절하였다가 치유되는 것을 집회 때마다 보아왔다.
인근 신촌교회에서 (고)김용기 장로님이 심령대 부흥회의 집회가 있어 참석하던 중 더 큰 은혜를 구하고자 경기도 광주군 동부면 동부리 가나안 농군학교 34기에 입학하였다. 박정희 대통령도 내각들과 함께 교육을 받고 새마을운동의 산실로 삼았다 하지 않는가.
장로님은 이렇게 신앙생활을 하여야 한다는 인생의 확실한 목표를 실천으로 보여주시며 구속의 은총은 나를 며칠 밤을 눈물로 지새우게 하시며 인격적인 예수님을 만나게 하여 주셨다.
모태신앙이 그러하듯 습관적인 잘못된 신앙생활에서 나를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도록 인도하여 주셨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신앙 생활한 것이 아니라 예배 참석 기도, 헌금 봉사한 모든 것이 습관적 형식적으로 억지로 나를 내세우기 위하여 신앙생활 해온 밖에 버리어 슬피 울며 이를 가는 바리새인이었음을 지적하여 주셨다.(마 6:1-4) 지금의 교회는 “오른손이 한 일 왼손이 모르게”가 아니라 성도가 오른손이 한 일을 박수를 쳐주고 나팔을 불어주어 자기상을 받게 하여 주지 않는가? 교회의 각종 봉사자들에게 장학금 등 보수를 지급하여 눈을 가리고 높은 곳에 올려놓고 흔들어 댄다면? 지금의 교회 지도자들이 각성해야 할 것 같다.
자녀, 재산, 건강 다 잃어버리고 아내마저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는 저주에 “주시는 분도 가져가시는 분도 여호와시니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 뿐이다.” 라는 욥 할아버지를 늘 바라보며 살고자 한다.
아골 골짝 빈들에도 소돔 같은 거리에도 부르시면 가리라. 지옥에라도 거기 계시면 가리라 하는 소명의식을 그에게서 배웠다. 믿음의 스승이시오. 신앙의 아버지 되신 그분을 만난 3월이 되면 늘 생각난다.
김홍완 장로 (남이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