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승만 대통령이라 부르기보다 이승만 박사라고 부르기를 좋아한다. 그는 우리가 건국의 아버지라고 부르기에 결코 부족함이 없는 것이, 일제의 35년간의 통치에서 독립을 염원했을 때에 해외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모든 재능을 발휘해 헌신하였고, 그 후 해방된 조국에서 초대 대통령으로서 수많은 역할을 하였음을 부인할 수 없는 국부같은 존재인 것은 부인할 수 없지만 말년에 그가 저지른 여러 가지 망령된 행태는 또한 그의 공을 덮고도 남기에, 내가 직접 느낄 수 있는 범위 내에서 그가 끼친 애국적이고, 신앙적이며, 또한 친근한 할아버지의 인상을 간직하고픈 마음으로 그를 ‘존경하는 박사님’으로 품고 싶을 뿐이다.
이 박사는 1875년 3월 26일에 태어나서 여러 가지 풍파를 겪으면서 1910년에 미국 프린스턴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천재였다. 배재학당에서 공부하며 선교사로부터 영어를 배웠지만 타고난 천재성으로 일찍이 영어를 터득하였고, 한성감옥에 갇혔을 때에 ‘하나님의 섭리’로 신앙에 눈을 떴고, 이때에 성경을 열심히 공부하면서 영어로 쓰인 성경을 모두 암기할 정도의 실력을 지녀, 후에는 미국 사람보다 영어를 더 잘하는 사람으로 인정받을 정도의 실력을 갖추게 되었다. 1957년3월은 내가 중학교 2학년으로 진급하였고, 이때에 학교에서 단체로 경무대(청와대의 예전 이름)를 방문했다. 우리는 학교에서 줄을 맞추어 마치 봄나들이를 가듯 경무대 경내에 들어갔고, 마침 정원에 산책 나온 이 박사를 만나서 함께 인사하고 사진을 찍는 영광도 누리게 되었다. 그때 보았던 그의 인상은 우리를 몹시 사랑하는 다정한 할아버지의 모습이었다.
1948년 5월 31일에 198명의 제헌의원이 모여 열린 역사적인 첫 번째 의회에서 임시의장으로 선출된 이 박사는 ‘우리가 여는 이 역사적인 회의를 당연하게 기도로 시작해야 한다’고 말하고 당시에 목사였지만 의원이었던 이윤영 의원을 호명하여 기도를 하게 함으로 우리나라는 개국을 하나님께 보고 드리고 시작하는 이 전무후무한 역사적인 사건을 이루게 되었다.
정치적인 지도자는 특히 아무리 처음에 좋았더라도 끝이 나쁘면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이 정설이기에 독재와 부패에 시달렸던 국민이 4·19혁명으로 그의 정권에 격렬한 저항을 하자 「국민이 원한다면 하야(下野) 해야 한다」는 지극히 당연한 말을 남기고 하와이로 망명했다가 병사했다. 이는 평소에 그가 신봉하던 민주주의의 원칙인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는 평범한 진리를 깨닫고 그대로 순종하는 원칙주의자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6·25동란이 휴전협정으로 끝난 후에 한국의 튼튼한 장래를 위해 별로 탐탁해하지 않는 미국을 윽박지르듯 교섭해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함으로 우리는 영원히 미국의 핵우산 속에서 국가의 안위를 꾀할 수 있게 되었으니, 오늘날 우크라이나의 비극을 보면서 다시 한 번 그의 탁월한 혜안에 놀라면서, 이 또한 우리나라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임을 감사드리게 된다.
옛날 독립운동 하던 시절에 때로는 하루에 한 끼로 버텼던 이 박사, 그리고 가난한 나라의 영부인으로서 심지어는 펑크난 양말도 손수 수선해서 신을 정도로 검약이 몸에 배었던 영부인, 그리고 영어의 천재도 사망 전에는 한국말만 해서 이에 익숙하지 않던 프란체스카 여사를 당황시켰던 「영원한 한국인 이승만 박사」의 153회 생일인 3월 26일이 바로 오늘이다.
백형설 장로
<연동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