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산책] ‘진리의 나무’와 ‘진리의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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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 1335년~1408년)는 무학대사(無學大師, 1327~1405)와 가끔 바둑을 두곤 했습니다. 두 사람의 실력은 대등했으나 언제나 이기는 쪽은 이성계였습니다. 무학대사가 혼자말로 중얼거립니다. “이상도 해라, 기막힌 묘수를 두는데 어째서 늘 지기만 하는고?” 이 말을 들은 이성계가 껄껄 웃으며 말했습니다. “우물 속에서 하늘이 제대로 보이겠소? 지금 대사는 ‘나무를 보고 있지만 나는 숲’을 보는 중이라오.” 무학대사는 잔 수에는 밝아 부분적인 묘수를 잘 찾아내지만 이성계는 대세에 밝아 반상(盤上)을 두루 살폈던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성계와 무학대사가 길을 가다가 웬 농부가 산 밑에다 집을 짓고 있는 광경을 보게 되었습니다. 풍수지리에 능한 무학대사가 말했습니다. “저 농부는 3년 안에 분명 거부(巨富)가 될 것입니다. 고래 등 같은 기와집이 들어설 자리이니 보나마나 금방 복이 들어 올 것입니다.” 그런데 이성계는 무학대사와는 달리 정반대의 의견을 내놓았습니다. “글쎄요, 내가 보기에는 아니올시다.” 풍수지리에 밝은 무학대사가 자신만만하게 말했습니다. “그럼 우리 내기를 해보는 것이 어떨까요? 3년 후에 저곳에 고래 등 같은 기와집이 들어서는지 아니면 폐가(廢家)가 들어서는지?” “좋소. 무엇을 걸어도 내 차지가 될 것이요.” 두 사람은 서로 장담하며 다시 길을 떠났습니다. 

그로부터 삼년 후, 우연히 그곳을 지나던 무학대사의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농부가 집을 지었던 곳은 잡초만 무성했고 이성계의 말대로 폐가가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저 집에 살았던 사람은 필시 거부가 됐을 텐데 어찌하여 폐가로 변했단 말인가? 그리고 이 소식을 이성계에게 전했습니다. 

그러자 이성계가 빙긋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내가 전부터 대사와 바둑을 두며 누누이 말하지 않았소? 대사는 잔 수에는 밝으나 대세에는 약하다고 말이오. 저 집이 저렇게 될 줄 몰랐던 것은 다 그 때문이오.” 무학대사가 의아한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아니 저 집과 바둑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허허, 생각을 좀 해보세요. 저곳이 폐허가 된 것은 대사의 풍수지리가 정확히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오.” “제 말이 정확해서 그렇다니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십니까?”

“대사의 예상대로 저 집주인은 큰 부자가 되었소. 하지만 그곳은 외딴 산골인데 거부가 된 사람이 이런 골짜기에서 계속 살고 싶겠소? 틀림없이 사람들이 많은 도시로 나가 떵떵거리며 살고 싶지요. 그러니 나는 곧 주인이 떠날 것을 예측하고 폐허가 된다고 내다본 것이요.” 무학대사는 이성계의 안목에 다시 한 번 놀랐습니다. 그리고는 이성계에게 허리를 굽히며 말했습니다. “바둑도 풍수지리도 소승이 한 수 아래입니다.” 

유학(儒學)의 골수분자인 태조 이성계와 무학대사의 이야기는 기독교의 진리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두 사람의 이야기 속에 우리의 뇌리를 스치는 한 가지 교훈을 떠올리게 됩니다. 윗글에는 “나무는 보고 숲은 보지 못한다”는 말이 나오는데 이 말은 전체를 보지 못하고 작은 부분에만 집착함을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보통사람의 약점은 부분만 보고 전체를 보지 못함에 있음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성서의 부분과 전체를 고루 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성경 전체를 총괄적으로도 이해할 줄도 알고 또한 부분 부분의 말씀을 세밀하게 관찰할 줄도 아는 섬세함이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풀어서 말하면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우리에게 일러주시는 ‘말씀의 숲’과 ‘말씀의 나무’가 무엇인지를 이해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성경 전체에 일관되게 흐르고 있는 “하나님의 구속(救贖)의 역사”가 <숲>이라면, 구속의 역사를 이루기 위한 “하나하나의 율법”은 <나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풀어 말해서 인류구원이라는 하나님의 ‘언약’이 “진리의 숲”이라면 언약의 실현을 위한 ‘규례’나 ‘율례’는 “진리의 나무”가 되는 것이지요. 우리의 올바른 신앙을 위해서는 성경이 우리에게 일러주시는 “말씀의 숲”과 “말씀의 나무”를 잘 알고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그리스도인은 “진리의 숲”이라는 전체도 보고 “진리의 나무”라는 부분 부분도 놓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문정일 장로

<대전성지교회•목원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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