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 믿음으로 한국 땅에 뛰어든 배위량 목사 (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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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에서 상주까지 (51) 

우연일까, 섭리일까? 필자는 2015년 9월 1일부터 2016년 8월 31일까지 연구년을 맞이하여  독일로 떠났다. 1989년 3월 1일부터 시작하여 1991년 8월 31일까지 교수로 생활을 했지만, 중간에 선교사 생활과 독일 튀빙엔(Tübingen)에서의 유학생활후 2003년 3월 1일부터 교수로 다시 살고 있었다. 그런데 1989년부터 2년 6개월 동안의 정년교수 생활을 한 후 오스트리아에서 선교사로 그리고 독일에서 신학 공부로 11년 6개월 정도 시간을 보내면서 박사 학위를 받은 후, 2003년 3월 1일부터 2008년 2월 28일까지 비정년교수 생활을 하였다. 그 후 교수로 임직되어 생활하면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연구년 1년을 독일에서 보내게 되었다. 2015년 9월부터 1년간의 연구년을 일생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가지게 되었다. 당시 연구년 1년 동안에 해야 할 과제가 많았다. 그 중에서도 반드시 해야 할 일을 찾아야 되었다. 그 중에서도 먼저 해야 할 것은 2003년부터 계획해 두고 있었지만, 여러 가지 여건상 못하고 미뤄왔던 ‘정류 이상근연구’였다. 그것을 위하여 정류가 안식년 동안 머무르면서 자서전의 많은 부분을 저술한 독일로 갔다. 그것은 정류가 무슨 생각으로 신학을 공부했고 그의 신학 단초가 무엇인지를 찾고자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그렇게 정류 신학 단초와 그의 신학을 찾고자 했던 이유는 필자가 만난 대부분의 사람들이 정류는 목회자이지 신학자가 아니라고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신학자와 목회자들은 정류를 신학자로 연구하고자하는 필자의 의도를 곱게 보지 않았다. 그것은 정류 생각의 언저리를 찾는다면 그의 신학 단초와 중심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가 안식년 동안 머무르면서 자신의 생각을 가다듬고 신학적인 상상의 날개를 펼쳤던 독일로 갔다. 물론 정류는 미국에서 석사학위 과정과 박사학위 과정을 했기에 미국 중심의 사고가 중요했으리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정류가 이룩했던 위대한 그의 주석들을 보게 되면 중요한 매듭에 독일 신학자들이 언급되었다. 정류의 삶의 중심축에서 중요하게 작용한 많은 부분이 독일 경건주의 사상의 중요한 근저에 있다고 봤기에 독일로 가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필자는 미국을 방문한 적인 없어 미국으로 가고 싶은 마음도 많았지만 모든 것이 낯선 지역에 가면 적응하는데 시간을 빼앗겨 정작 중요한 연구와 집필에 적응하는데 시간이 너무 소요될 듯하여 오직 연구와 집필을 목표로 하여 필자가 선교사 생활을 했고 박사학위를 받기 위하여 공부한 독일어 권역으로 가서 연구년을 보내고자 했다. 여건상 가족들과 같이 가지 못하고 혼자 필자가 공부하는 동안 머물렀던 독일 튀빙엔으로 가서 그곳에 있으면서 정류신학 단초와 신학의 중심을 찾고자 했다. 

정류의 일면은 수도자적인 면이 강하다고 생각하여 필자는 때때로 주말에 독일과 오스트리아 그리고 프랑스에 산재한 여러 곳의 수도원을 방문하면서 수도원이 무엇을 하는 곳인지, 어떤 곳인지를 가서 보았다. 때때로 수도원을 체험하고자 멀리까지 가서 하루 또는 이틀을 수도원에 방을 얻어 잠을 자면서 수도원을 경험하면서 그분들의 생활을 엿보기도 했다. 가까운 거리의 수도원은 당일 길로 다녀오기도 했고 먼 거리에 있는 경우는 수도원에서 숙박하면서 수도원을 직접 체험했다. 

정류의 자서전에 자주 언급되는 독일 하이델베르거(Heidelberger)에 있는 ‘철학자의 길(Philosophenweg)’은 독일 철학자들이 자주 걸었던 산책로이다. ‘철학자의 길’은 정류가 독일 하이델베르거에 머무르면서 자주 찾았고 걸으면서 명상에 잠겼던 길이다. 필자도 하이델베르거에 한 달가량 머물면서 자주 그곳을 찾았고 그 ‘철학자의 길’을 걸으면서 정류의 생각의 언저리를 알고자 노력했다. 

그러다가 튀빙엔에서 공부하는 유학생들이 필자의 연구년의 구상을 듣고난 뒤에 “스페인의 산티아고 길을 걷게 되면 정류의 수도사적인 일면을 더욱 이해하게 되고 사고(思考)의 중요한 부분을 찾게 이해하게 될 것 같으니 한번 가보시라”고 추천하였다. 그 때까지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알고는 있었지만 의식하지 않고 살았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처음 들을 때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하지만 수도원 방문을 계속하면서 수도원 주위에 있는 산티아고를 향한 표지판을 보게 되었다. 그것을 보면서 유럽은 산티아고 순례길로 이어지는가란 생각을 하게 되었고 ‘산티아고 순례길’로 향하는 표지판들 때문에 산티아고 순례길을 한 번 걷고 싶은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프랑스에 있는 개신교 수도원인 떼제 공동체(The Taizé Community)를 방문하는 계획에 더하여 ‘산티아고 순례길’ 한 달을 추가시키게 되었다. 

떼제 공동체에서는 한 주 정도 머물면서 그곳의 삶에 철저하게 적응하고자 세운 규칙에 어긋나지 않는 생활을 살고자 노력했고 많은 기도 생활과 찬송 생활이 연구년 동안 짓눌려 있던 삶의 패턴에 새로운 활기를 되찾게 하였다. 

2015년 4월부터 시작된 산티아고 순례길 탐방을 위하여 프랑스 파리를 거쳐 스페인 국경에서 가까운 프랑스 국경 도시 ‘생장 피에드 포트’(‘Saint Jean Pied de Port’)로 가서 생전처음 여행자 숙소 ‘알베르게(albergue)’에 가서 일박을 한 후 새벽 일찍 ‘알베르게’에서 순례자들을 위하여 준비해 준 빵을 한 조각씩 먹고 피레네 산맥을 넘어 스페인으로 가는 40여일 간의 대장정이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된 산티아고 길을 따라 ‘생장 피에드 포트’를 출발하여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를 거쳐 땅끝 마을인 ‘피니스텔라(Finisterre)’와 ‘묵시아(Muxa)’까지 2,300여 리를 걸었고 또 남는 시간에는 포르투갈 길도 걸었다. 산티아고 길을 걸으면서 세계 각처에서 온 무수한 젊은이들을 만났고 한국에서 온 많은 젊은이들도 만났다. 그 많은 젊은이들을 만나 대화하면서 그들이 외롭고 황량한 그 길로 왜 나왔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들 나름대로 인생의 길에서 인고(忍苦)의 경험을 각자 가지고 살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사람이 자신의 삶의 터전을 떠나 길을 나선다는 것은 자신의 삶에 처한 여러 가지 여건으로부터의 승리를 향한 처절한 투쟁이고 간절한 갈망이라고 본다.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필자는 20살 남짓한 어느 스위스 남자 대학생을 만났는데 그는 스위스부터 걸어왔다고 했다. 프랑스 국경 도시가 아닌 스위스부터 도보로 순례하여 왔다는 말에 깜짝 놀라 그와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부자의 아들로 스위스에서 태어났고 명문대학교에 입학해 남부럽지 않은 환경에서 살았지만 다양한 삶을 경험하기 위해 길을 나섰다고 했다.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이런 저런 사연을 가진 많은 순례객들을 만나 그들과 같이 걷기도 하고 대부분의 시간은 홀로 산티아고 길을 걸으며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배재욱 교수

<영남신학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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