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광장] 나와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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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잘 알고 암송하는 김춘수 시인의 유명한 시 “꽃”은 이렇게 시작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생략)

나와 그가 서로에게 의미있는 존재가 되는 과정을 이름 부르기와 꽃으로 상징하고 있는 이 시는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하다. 그런데 이 시는 또한 나의 나 됨에 대한 깊은 통찰을 우리에게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내가 꽃이라는 의미있는 존재가 되는 것은 나에게 다가와 나의 이름을 부르고 나를 인정해 주는 상대방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혼자서 내면을 들여다보고 사색한다고 해서 찾아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나와 동료 인간과의 관계속에서만 찾아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생각해보면 나를 특징지우는 모든 형용사는 다 상대적이다. 키가 크다든가, 부자라든가, 누구의 남편이라든가 하는 나를 묘사하는 대부분의 문장은 누군가와의 관계 혹은 비교를 통해서만 의미가 부여되는 것이다. 사람을 뜻하는 한자어 인간(人間)은 글자 그대로 사람사이의 관계를 의미한다. 동양에서 인간은 천, 지, 인 삼자의 관계속에 위치하고 인간이 따라야 할 도덕규범은 부모와 자식, 왕과 신하라는 사회적 관계에 의해 규정된다고 했다.

유대교 랍비이자 철학자인 마틴 부버는 <나와 너>라는 책에서 철학적으로 이 문제를 깊이있게 다루었다. 부버에 의하면 “나”라는 인간이 자신의 의미를 발견하고 자신의 진정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은 바로 “너”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나”는 동료인간인 “너”와의 만남을 통해서만 나의 나됨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부버는 삶은 곧 만남이라고 말한다. 삶의 여정에서 최초의 만남은 부모와 형제로부터 시작해 배우자, 친구, 스승, 동료로 이어지면서 이 만남이 나의 삶을 결정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사람과의 만남을 통해서 궁극적으로 영원한 타자인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고 부버는 주장한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때에 비로소 타인과 참다운 관계를 맺을 수 있고 나아가서 나 자신의 정체성을 찾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 자신의 이익과 만족만을 위해서 부와 명예와 권력을 추구하는 것이 삶의 전부가 될 수 없는 것은 명백하다. 그러함에도 현대사회에서는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타인을 희생하고 부정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정의를 무시하는 일을 태연히 자행하는 일이 벌어진다.

그러나 타인이 없으면 나도 존재할 수 없고 나 자신의 정체성도 사라진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부터 우리는 정의와 공의보다 나 자신의 이익이 앞설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우리 존재의 의미와 그 근거를 깊이 성찰한다면 부와 명예와 권력이 우리의 삶에서 행복을 가져다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우리는 모두 동료 인간에게 빚진 존재이다. 혼자 잘 사는 것은 아무 소용없는 일이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서로 한 뿌리에서 나온 가지들이기 때문에 깊은 행복과 만족은 서로 돕고 서로를 인정하는데서 온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가 탐욕으로 치달으면서 경제위기와 공황과 경제적 불평등의 늪에 빠져들기 이전에 일찌감치 우리 존재의 근원에 대한 이러한 인문학적 성찰을 통해서 서로 존중하는 인간적인 사회를 이룰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김완진 장로

• 소망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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