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 100냥이면, 눈은 90냥이라는 말이 있다. 눈의 소중함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눈으로 보는 것은 지극히 제한적이다. 멀리 있는 것도 볼 수 없고, 너무 작은 것도 볼 수 없다. 너무 밝아도, 너무 어두워도 볼 수가 없다. 적외선, 자외선, X선, 감마선, 모두 인간의 육안으로는 볼 수가 없다. 착시현상까지 있어서 인간이 본다는 것은 믿기 어려울 때가 있다. 사람의 시력은 좋아야 2.0인데 매의 시력은 8.0~9.0이나 된다고 하니 비교가 되지 않는다. 눈은 사람이 살아가는데 소중한 기관이지만, 완전한 것은 결코 아니다. 이렇게 불완전한 인간의 눈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볼 수가 없다. 하나님은 인간의 가시광선의 범위를 초월하시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는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 수가 없다. 그래서 제2계명은 이방신들의 우상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만드는 것도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의 기록에서 하나님의 ‘모습’을 가장 근접하게 ‘보았던’ 인물은 에스겔이었다. 육체의 눈으로 본 것이 아니라, 영의 눈으로 이상(vision) 중에 본 것이다. 에스겔은 그가 보았던 ‘하나님의 모습’을 이렇게 기록했다.
“…궁창 위에 보좌의 형상이 있는데 그 모양이 남보석 같고, 그 보좌의 형상 위에 한 형상이 있어 사람의 모양 같더라. 내가 보니 그 허리 위의 모양은 단쇠 같아서, 그 속과 주위가 불같고, 내가 보니 그 허리 아래의 모양도 불같아서 사방으로 광채가 나며 그 사방 광채의 모양은 비 오는 날 구름 위에 있는 무지개 같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이라. 내가 보고 곧 엎드려 말씀하시는 자의 음성을 들으니라.” (겔 1:26-28)
이렇게 에스겔은 이상(vision)으로 보았던 하나님의 모습을 묘사했다. 그런데 눈부시게 광채가 나고 아름다운 모습을 인간의 언어로 다 표현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남보석 같고’ ‘단쇠 같고’ ‘불 같고’ ‘무지개 같고’ 하는 식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에스겔이 보았던 것의 클라이맥스는 ‘하나님의 모습’을 본 것이다. 찬찬히 에스겔이 본 것을 읽어본다. 에스겔은 하나님을 보았나? 아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나? 아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영광의 형상’을 보았는가? 그것도 아니다. 에스겔이 본 것은 ‘하나님의 영광(glory)의 형상(likeness)의 모양(apperance)’이었다.
‘하나님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 얼마나 완곡한 표현인가! 하나님은 인간이 감히 가까이 범접할 수 없는 존재이다. 하나님의 은총이 아니고서는 인간이 가까이 할 수도 없는 존재가 하나님이다. 그러나 한편 예레미야서에는 이런 말씀이 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는 가까운 데에 있는 하나님이요, 먼 데에 있는 하나님은 아니냐.” (렘 23:23) 예레미야의 말씀은 일견 에스겔이 보았던 하나님의 모습과는 정반대되는 것같이 들린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인간이 감히 가까이할 수 없는 하나님이지만, 하나님은 친히 인간을 향해 가까이 다가오신다. 그것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베푸시는 은사요, 은총이요, 사랑이다. 하나님께서 가까이 오셔서 우리를 부르시고 택해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알게 되고, 감히 하나님께 가까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박준서 교수
<피터스목사기념사업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