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우연한 기회에 연세대학교 김형석 명예교수의 유튜브 영상을 들여다보다가 김 교수의 평양숭실중학교 재학시절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당시 그는 《마우리(Mowry, 1880~1970, 한국명: 모의리=牟義理)》 선교사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고 김 교수가 25세이던 1945년 8월 14일 밤, 그러니까 광복 전야(前夜)에 꿈속에서 ‘마우리’ 선교사를 만난 신비로운 꿈 이야기를 듣다가 불현듯 내가 54년 전인 1968년 서울 용산 해방촌 언덕에 자리잡았던 숭실학교에서 ‘마우리’ 선교사를 만났던 기억이 떠올랐다.
나는 1957년 숭실고등학교에 입학해서 3년간 공부하는 동안, 스승님들 중에 평양 숭실중학교(5년제)에서 공부하신 은사가 두 분(金得龍/金正連)이나 계셨고 또 김형석 교수께서 연세대 철학과 재직 중에 자주 학생수양회에 오셔서 평양 숭실학교 이야기를 들려주시곤 하였다. 숭실학교가 한국전쟁으로 인해서 평양에서 장소를 서울로 옮겼을 뿐, 평양의 숭실 이야기를 자주 듣다보니 평양 숭실이 귓전에서 맴돌았고 눈앞에 어른거리곤 하였다.
해방촌 숭실에서 부르던 교가는 평양 숭실의 교가 그대로였다. “모란봉이 달아 오다 돌아앉으며/ 대동강수 흘러나려 감도는 곳에/ 백운 간에 솟아 있는 층층한 집은 합성숭실학교/ 숭실 숭실 합성숭실/ 숭실 숭실 합성숭실/ 숭실 숭실 합성 숭실/ 만세 만세 만세” 여기서 《합성 숭실》이란 ‘숭실중’ ‘숭실전문’ 그리고 ‘숭의여학교’를 묶어서 지칭한 것이라 했다. 당시 서울 숭실은 평양 숭실의 교훈을 그대로 사용하였는데 “*신의에 사는 참다운 인간이 되자. *충효를 다하는 옳은 국민이 되자. *연마에 진지한 바른 학도가 되자” 등 세 가지 항목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마우리(Mowry)” 선교사는 1909년 선교사로 내한하여 선교사역을 시작한 이후 1941년 부득이 한국을 떠날 때까지 32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숭실을 위해 헌신했던 분이었다. ‘마우리’ 선교사는 평양 숭실학교의 교장으로서 일본당국의 신사참배를 끝까지 거부하였다. 최종적으로 ‘신사참배’냐 아니면 ‘폐교’냐 하는 양자택일의 기로에서 1938년 3월 그의 행정적 책임 아래, 평양 숭실은 폐교의 절차를 밟고 문을 닫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1919년 3·1운동 때는 마펫(Samuel Moffet, 한국명: 마포삼열=馬布三悅) 선교사, 매큔(Macune, 한국명: 윤산온=尹山溫) 선교사 등 미국인 동역자들과 함께 시위에 참가하였으며, 일본경찰의 추격을 받고 있던 한국인 애국지사를 자택 지하실에 은신시켜 목숨을 구해주기도 하였다. 전술(前述)한 바와 같이 1938년 숭실학교가 폐교되기에 이르렀고 1941년 미국 선교부의 권고로 그는 부득이 한국을 떠나게 되었다.
1967년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모교 숭실에 영어교사로 부임하였다. 1968년 대한민국 박정희 정부는 ‘마우리’ 선교사 부부를 한국으로 초청하여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61세에 한국을 떠났던 마우리 선교사가 27년 만인 88세에 다시 한국 땅을 밟게 된 것이었다. 그때 그는 해방촌 숭실학교를 방문하였는데 방문 당일 오전, 영어선생 8인이 잠시 교장실에 모여 누가 통역을 할 것인가를 의논하였다. 영어회화에 능숙한 양(楊) 모 선생은 출장이 예정되어 있었으므로 미국인을 양부(養父)로 둔 박(朴) 모 선생이 통역을 맡기로 의논이 되었다. 그런데 훗날 알게 된 것이지만 그날 박 모 선생에게 갑자기 부득이한 사정이 생겼다고 했다.
김희선(金熙善) 교장께서 큰 소리로 “문정일 선생 앞으로 나오시오”하는 말을 듣고 나는 어찌된 영문인지 몰라 당황해서 뛰어나갔다. 다음 순간 교단에 올라서서 ‘마우리’ 선교사에게 “쉬운 영어로 말씀해 주세요” 한 마디 하고는 바로 통역에 임하였다. 나의 영어는 많이 미숙하였지만 ‘마우리’ 선교사께서 쉬운 영어로 말씀해주신 덕택에 대과 없이 통역을 마치게 되었는데 지금 돌아보면 나의 생애에 매우 영광스런 경험이었다. ‘마우리’ 선교사, 그 어른은 비단 ‘숭실인(崇實人)’ 뿐만 아니라, 한국인 모두의 스승이요, 영원한 은인이라 하겠다.
서울 숭실을 방문한 마우리 선교사 부부(1968)
문정일 장로
<대전성지교회•목원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