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들의 생활신앙] 봄을 기다리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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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같이 春夏秋冬(봄-여름-가을-겨울)이 분명한 나라는 늘 다음 계절을 기다리며 지루하지 않게 소망과 기대를 갖고 살아간다. 동굴은 속이 막혔기에 공포의 대상이지만 터널은 나아갈 곳이 있기에 기쁜 마음으로 통과하게 된다. 추운 계절이 1년 내내 계속된다면 그 삶이 매우 건조하고 어두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꽃 피고 새우는 새봄(新春)을 기다리기에 추운 겨울도 견딜 만하다. 그래서 봄을 기다리는 시(詩)도 많이 있다. 이해인 시인도 소녀 시절 김소월의 <진달래꽃>, 한용운의 <님의 침묵>, 타고르의 <기탄잘리>, 청록파 시인들(조지훈, 박두진, 박목월)의 시집과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읽고 감동했다 한다. 봄은 꽃으로만 오지는 않는다. 여인들의 가벼워진 옷차림새로도 오고, 풀리는 강물로도 오고, 맵지 않은 바람으로도 오고, 쟁깃날에 일어서는 흙덩이로도 오고 눈밭을 이기고 자라는 푸른 보리 새순으로도 다가온다. 옛날 선비들은 동짓(冬至)날 창호지에 하얀 매화꽃을 81송이(9×9=81/九九消寒圖)를 그려 벽이나 창문에 붙여 놓고 매일 하루에 한 송이씩 빨갛게 색칠을 했다. 동짓날부터 81일이 되는 날 그림 속의 매화꽃 81송이가 모두 빨간색으로 그려진 날. 창문을 열면 어느새 정원에는 봄을 알리는 진짜 매화가 꽃을 피우고 향기를 품어 내고 있는 것이다. 중국에서 전해진 이 겨울 놀이(9×9=81)는 9일 단위로 추위가 더해가다가 다시 누그러지는(三寒四溫 같은 주기) 현상을 표현하고 있다. 기나긴 엄동설한을 보내면서 온풍기나 난로 대신 희망과 기다림이란 ‘꿈’으로 겨울을 이겨낸 것이다. 꿈은 봄을 기다리는 여유로움이었다. 우리 선조들의 낭만과 여유이며 기다림의 미학(美學)이었다. 다시 말해 품격 있는 겨울나기의 지혜라 하겠다. 꼭 매화만 그린 것이 아니라 ‘정전수유진중대춘풍’(亭前垂柳診重待春風/뜰 앞의 수양버들은 진지하게 봄바람이 불어오기를 기다린다)이란 시를 적어 놓기도 했다. 이 시는 모두 9획으로 된 9글자(9×9=81)이므로 역시 하루에 한 편씩 써가면 81일간 쓰게 되어 있다. 다른 방법으로 꽃 대신 81개의 원(圓/동그라미)을 그려놓고 흐린 날엔 위쪽을, 맑은 날엔 아래쪽을, 바람 부는 날엔 왼쪽을, 비 오는 날엔 오른쪽을, 눈 오는 날엔 가운데 쪽을 색칠해 81일간의 날씨 기록을 만들기도 했다. 우리도 꽃송이에 미움 대신 사랑을, 교만 대신 용서를 그려 넣어 새해, 새 희망을 노래했으면 좋겠다. ① “매양 추위 속에/해는 가고 또 오는 거지만/새해는 그런대로 따스하게 맞을 일이다//얼음장 밑에서도 고기가 숨 쉬고/파릇한 미나리 싹이/봄날을 꿈꾸듯//새해는 참고/꿈도 좀 가지고 맞을 일이다//오늘 아침/따뜻한 한 잔 술과/한 그릇 국을 앞에 하였거든//그것만으로도 푸지고/고마운 것이라 생각하라//세상은/허망하고 각박하다지만/그러나 세상은 살만한 곳//한 살 나이를 더한 만큼/좀 더 착하고 슬기로울 것을 생각하라/아무리 매운 추위 속에/한 해가 가고/또 올지라도//어린 것들 잇몸에 돋아나는/고운 이빨을 보듯/새해는 그렇게 맞을 일이다”(김종길/설날 아침에). ② “아직 잔설 그득한 겨울 골짜기/다시금 삭풍 불고 나무들 울다/꽁꽁 얼었던 샛강도 누군가 그리워/바닥부터 조금씩 물길을 열어 흐르고/눈과 얼음의 틈새를 뚫고/가장 먼저 밀어 올리는 생명의 경이/차디찬 계절의 끝을 온몸으로 지탱하는 가녀린 새순/마침내 노오란 꽃망울 머금어 터뜨리는/겨울 샛강, 절벽, 골짜기 바위틈의/들꽃, 들꽃들/저만치서 홀로 환하게 빛나는//그게 너였으면 좋겠다/아니 너다”(곽효환/얼음새 꽃). ③ “물 건너고 또 물 건너/꽃 보고 다시 꽃 보며/봄바람 이는 강 언덕길 따라/몰란 결에 그대 집에 닿아버렸네”(渡水復渡水/看花還看花/春風江上路/不覺到君家). 이런 계절 이런 분위기에 자주 인용되는 영시 한 구절이 있다. 영국 시인 Percy Bysshe Shelley(1792-1822)의 <서풍부/西風賦>의 끝 구절이 있다. “예언의 나팔이 되어다오. 오, 바람이여/겨울이 오면 봄도 멀지 않으리”(If winter comes, can spring be far behind).

김형태 박사

<한남대 14-15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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