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 도구가 되게 하소서 < 2>
한국보육원과 김유선 여사 ②
김유선 여사 아버지 김관식 목사
사변 겪지 않고 하늘나라 계셔 감사
언니 가족들과 제주도로 피난 떠나
작은 교회를 중심으로 피난민 모여
나는 그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신 지 2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신 지는 이미 4년이 되던 때인지라, 막내로 자라던 내게는 말할 수 없이 타격도 컸고 슬픔도 채 가시지 않았던 때였다.
기독교연합회 회장으로 계시던 아버지 김관식 목사님이 세상을 떠나셨을 때 우리는 그 당시 동자동에 위치했던 조선신학교(지금의 한국신학대학) 사택에서 살았었고, 또 조선신학교 교장인 송창근 박사님과 아버님과는 형님 동생하며 무척 가깝게 지내던 사이라, 아버님의 장례식은 신학교 교정에서 송 박사님 자신이 손수 학생들을 지휘해 성대하고도 엄숙하게 치렀었다.
그때 송창근 목사님이 내 장례식은 누가 이렇게 해주려노 하시던 말씀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그런데 나중에야 안 일이지만 그 6‧25사변 통에 납북당하셨다니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지 모른다.
나는 이화여대에서 졸업을 앞두고서, 그리고 졸업식을 맞이하면서 세상 떠나신 아버지 어머니 생각이 나서 밤마다 기숙사 이불 속에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오늘에 와서 돌이켜 생각해 보니 그러한 사변을 겪지 않고 평안히 하늘나라에 가 계신 아버지와 어머니를 생각할 때 얼마나 감사한 일이며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나라를 근심하며 친구들 소식이 궁금해 안타까워하면서도 아버지 어머니가 서울에 계시지 않고 하늘나라에 계신 것을 참으로 기쁘게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제주도 법환리
그 뒤에 나는 어린 삼남매를 데리고 피난 나온 언니를 만나게 되었다. 형부인 엄요섭 목사는 캐나다에 유학간 때라 언니도 고달파 보였다. 결국 언니 가족들과 함께 제주도로 피난 가는 LST 배에 몸을 싣게 되었다.
그 배를 마치 노아의 방주나 되는 것처럼 생각했던지 모르지만, 믿는 사람들만 모아서 피난 가도록 어느 기관에서 주선해준 배였다. 수천 명이나 되는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앞을 다퉈 그 배를 타고 부산항을 떠나게 되었다.
그때가 1951년 정월 그 어느 날이었다. 만 하루면 제주읍에 도착될 줄 알았었는데, 그 배는 목적지와는 달리 엉뚱하게 거제도에 이르러서는 우리에게 내리라고 하는 것이었다. 대표들이 나서서 의논을 하고, 다시 그들이 부산까지 가서 교섭을 하느라고 4, 5일이 걸렸다. 배안에서의 4, 5일이란 지옥과도 같은 고통이었으나, 어느 교회 성가대원들의 찬양으로의 봉사, 그리고 갑판 위에서 외치시던 어느 목사님(박학전 목사)의 말씀은 우리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고도 남음이 있었다.
어느 저녁노을조차 사라져 가던 저녁에 우리를 태운 배는 제주도 화순이라는 곳에 도착되었고, 마침내 우리는 그 갑갑했던 배에서 풀려나게 되었다. 그리고 잠시 뒤에는 밤이 왔고 밤과 더불어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그날 밤 우리는 어디 갈 데라고는 없었다. 전기도 없어 사방조차 분별할 수 없는 어느 집 외양간처럼 생긴 데를 빌려서 하룻밤을 자고 나니, 거기가 바로 그 집 부엌이라는 사실을 다음날 아침에야 알았다. 거기서 우리가 구해 먹었던 고구마와 김치(거무스름한 줄기김치)가 어떻게 맛이 있던지, 지금도 그 기막히던 맛이 생각나서 언제 한번 찾아가 다시 먹어보았으면 하고 생각해보곤 할 때가 있다.
그 뒤에 우리는 거기서 몇 십리 떨어진 법환리라는 동네에 가서 정착하게 되었다. 나로서는 처음 보는 동백꽃이 만발한 그 풍경이 내 마음을 달래주는 듯했다.
그 동네에 작은 교회가 하나 있었다. 우리 피난민들은 그 교회를 중심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찬양을 하고 주일학교를 하면서 서로 교제하고 위로하며 재미있게 지낼 수 있었다. 그때 초등학교 선생의 경험도 약간 가져보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이상한 소리에 놀라 잠이 깨었다. 주인댁이 하는 말이 폭도가 나왔으니 어서 숨어 있어야 된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옷 보따리를 울타리 여기저기에 숨겨 놓고, 고구마를 파고 난 구덩이에 어린 조카들과 언니와 같이 들어가서 엎드려 있었다. 웅성거리는 듯하던 공기가 감돌고 순식간에 사람 기척이 사라졌으나, 고요한 밤공기를 깨치고 요란스러운 총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하늘은 빨갛게 물들었다.
그 순간 나는 엎드려 얼마나 간절한 기도를 드렸는지 모른다. 그때까지의 나의 생애 중에서 가장 간절한 기도를 드린 한 순간이었다. 무엇이라 기도했는지 기억해낼 수 없으나, 살려주시면 내 생을 몽땅 주님께 드리겠다는 기도였었다고 생각된다.
공포로 떨던 그 지긋지긋한 밤을 보내고 제 정신을 찾아 일어나 보니 바로 우리가 살던 집 참대나무 울타리까지 불이 붙어 타내려 있었다. 총소리인줄만 알았던 그 따따따따 하던 소리는 바로 그 참대 울타리가 타던 소리였던 모양이다.
김희보 목사
· ‘人間 황광은’ 저자
· 전 장신대 학장
· 전 한국기독공보 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