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별’이라는 단어는 사람의 마음을 슬프게도 하고 긴장을 하게 한다. ‘고별 설교’에는 엄숙한 느낌이 온다. 마음을 숙연하게 해 준다. 120년 세월, 모세의 장엄한 생애가 마지막 시간에 이르렀다. 40년 간 미디안 광야에서 양떼를 돌보다가 가시떨기 나무 불꽃 앞에서 하나님의 소명을 받았다. 이후 40년 동안 자기 민족, 이집트에서 해방된 노예들을 지도하며 이끌었다. 자기 민족의 죄와 허물을 용서해 주시는 대신에 자신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제(除)해 달라고 탄원하던 위대한 사랑의 지도자, 백성을 위해서라면 자신은 어떤 희생이라도 감수해도 괜찮다는 모세의 거룩한 애민(愛民) 정신을 본다. 그토록 사랑하던 자기 민족에게 마지막으로 말할 시간 앞에 섰다. 얼굴에는 주름살이 깊게 패이고 백발(白髮)로 덮인 지도자 모세의 흉중(胸中)에는 만감이 교차했을 것이다.
자신에게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이 허락되지 않고 느보산에서 육신의 장막을 벗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이셨다. 황혼(黃昏)의 모세, 그의 심장도 떨리고 아쉬움이 컸을 것이다. 고별 설교를 듣게 되는 회중은 출애굽한 당사자들이 아니었다. 그들의 2세였다. 그들의 부모는 하나님의 진노 앞에서 다 죽었다. 그들 부모들은 모세에게 불평과 불만을 쏟아 놓으며 반항했다. 이는 바로 자신들을 구원해 주신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것이기도 했다.
모세가 애굽에서 민족을 구원해 나오라는 소명(召命)을 받았을 때 “주여 보낼만한 자를 보내소서”하며 겸손했다. 요셉 이후 400여 년 동안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결코 잊지 않고 계셨다. 애굽의 왕자, 미디안 광야 시절, 소명을 받은 후 40년은 모세의 세 번째 인생이다. 애굽에서 나오기가 바쁘게 애굽의 과일과 향료와 채소들을 그리워했던 백성들이다. 바위에서 물을 내어 마시게 해주었지만 그들은 강물을 원했다.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였지만 애굽의 고기를 원했다. 배은망덕했다. 11일이면 들어갈 가나안 땅을 40년이나 광야를 헤매게 하셨다.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는 이들의 생명을 취해 가셨다. 모세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까? 모세의 고별 설교는 길게 이어졌다. 첫째는 ‘기억하라’였다. 지난 ‘역사의 기억’이었다. ‘결코 잊지 말라’는 당부였다. 수백 년 간의 노예 생활,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현현(顯現)하심, 십계명, 구름 기둥과 불기둥, 만나와 메추라기, 그들이 기억할 것은 많았다.
이러한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와 이적을 눈으로 직접 봤으면서도 그들은 왜 실패했을까? 인생의 위험은 실패가 아니라 성공했을 때인가 싶다. 모세가 막대기 역할을 했을 때 승리가 있었다. 하나님을 향해 팔을 들고 있을 때 아말렉을 이겼다.
지난 세월은 오직 한 단어, 하나님의 은혜였다. 이것을 결단코 잊지 말라는 간곡한 당부였다. 그들로 노래하게 했다.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게 했다. 자신들을 황무지와 광야에서 눈동자와 같이 지켜 주셨음을 노래했다. 그리고 약속의 땅으로 전진했다. 순례자는 원수를 만나지만 고난을 무릅쓰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우리 하나님은 오직 유일하신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그러나 그들은 곧 잊었다. 자신들이 애굽에서 ‘진토’(塵土, 티끌), 먼지투성이였음을 잊었다. 가나안을 정복하고 도시를 건설하며 강하고 번성이 오자 곧 하나님을 망각했다. 분열되고 우상을 숭배했다. 주변 국가의 침략을 받았다. 예루살렘은 포위되었다. 모세가 고별 설교에서 경고했던 끔찍한 역사가 일어났다.
변화산에서 예수님께서 변형되실 때 모세와 엘리야가 함께 있었다. 모세는 약속의 땅, 산 정상에 서 있었다. 하나님께서 그의 꿈을 이렇게 이루어 주신 것이 아닐까? 실로 장엄한 시간이었다. 모세의 고별 설교는 우리 역사와 교회를 생각하게 한다. 일제 식민시대의 노예 생활,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하심으로 맞은 해방, 그리고 공산군의 침략으로 잿더미가 된 국토, 가난으로 인한 고난, 겨울에는 난로도 없던 교회 마룻바닥, 성령님의 은혜로 폭발적인 교회 성장과 발전, 우리는 다 잊고 있다. 교회의 세속화!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이 있다. 우리 한국교회가 야곱의 브니엘, 다메섹 도상(途上)에 다시 서야 하지 않을까? 진정으로 거룩한 애통(哀痛)으로 각성, 회개할 때가 아닐까!
김용관 장로
<광주신안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