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려서부터 가장 존경하는 사람으로 아버지를 꼽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태어나면서부터 교회에서 목사님으로 친숙하게 관계를 맺었으며, 또한 많은 사람들이 존경하는 내 아버지가 목사님인 것이 자랑스럽기도 하면서 항상 옆에서 보아온 아버지의 모습이 진정한 목사의 자세라 여길 수밖에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이러한 아버지는 1915년에 평안북도 의주에서 태어나, 일찍이 17살에 만주 봉천(지금의 심양)에 혈혈단신(孑孑單身)으로 이주했다. 마침 그곳에서 신앙심이 깊고 사업에도 성공한 이해철 장로를 만나, 취직도 하고 교회에도 나가면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면서 아주 열심히 교회 생활을 하다가 이 장로의 권유로 신학교에 가게 되었다. 그러면서 교회에서 만난 나의 어머니와 결혼해 이제는 한 가장이면서 목사와 교육자의 길을 걷게되면서 이 일이 그의 평생의 사명이 되었다. 그리고 누구나 인정하는 대로 그는 목사가 천직인 것으로 알고 일생을 살았다. 말년에 그렇게 힘들게 박사학위를 받고도 박사라고 불리기보다는 목사로 불리기를 더 원했으니, 그는 천상 목사였다.
나는 아버지가 욕을 하는 것을 한번도 본적이 없다. 어린 시절에 부모님이 대화하는 가운데 아버지가 ‘그자가…’ 하면서 몹시 분개하며 대화를 나누는 것을 얼핏 보았는데, 나중에 어머니의 설명에 의하면 이때 아버지가 사용한 ‘그자(者)가’ ‘놈’이라는 말이기에 아버지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쓰는 쌍소리라는 설명을 듣고, 크게 깨달았다. 덕분에 나도 평생을 살아오면서, 욕은 물론 쌍소리도 하지 않았음은 정말로 다행스런 일이라 여겨진다. 물론 이런 소심한 성격은 사회생활에서 박력이 없는 사람으로 대접을 받기도 하지만, 너무도 당연하게 인격이 있는 사람으로 대접받는 것은 사실이다.
어려서부터 고등학교 졸업까지는 매일 아침에 가정예배를 드렸다. 누나들이나 동생들은 간혹 여러 가지 핑계를 대고 빠지기도 했지만, 나는 거의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이때 함께 부르는 찬송에서 음악적인 소양을 배양했다. 돌려 읽는 성경에서 정확하게 읽는 법과 그 내용을 이해했다. 특히 매번 그 내용을 해석해주는 아버지의 강독(講讀)으로 명철했던 젊은 시절에 배운 성경 공부는 나의 일생을 지배했다. 그러면서 때로 내가 새벽에 일어나 화장실에 갈 때면 어김없이 기도하시거나 글을 읽고 계시는 모습은 나에게 참된 기독교인의 모습을 몸소 실천해 보이신 것이었다.
물론 아버지는 사업가가 아니기에 돈을 많이 벌 수는 없어, 생계는 전적으로 어머니 차지였다. 당연하게 아버지로부터 용돈을 따로 받는 일은 없었는데, 심지어 입대를 하는 당일에도 집을 떠나는 나에게, “기도는 하고 가야지”해서 다소곳이 앉은 내 머리에 손을 얹고 간절하게 기도를 한 후에 “잘 다녀오게” 하시면서 악수만 청하셨다. ‘그래도 입대하는 날인데’하며 조금은 섭섭했지만, 날이 갈수록 ‘나의 앞날을 위해 간절하게 기도해주신’ 그 사랑이 더욱 값진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아버지의 일생은 정말 사도 바울처럼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킨’ 생애였다. 그러나 그가 마지막 성업(聖業)으로 여겨 세운 교회를 막 시작할 때에, 뜻하지 않은 교통사고로 19년간 식물인간의 생활을 하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언제나 잠도 부족한 긴장의 생활 끝에 얻은 영원한 안식이었다. 내가 알기에 가장 고귀한 일생을 보내신 아버지의 삶은, 그러기에 항상 ‘본받을 생애’다.
백형설 장로
<연동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