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이 되면 이육사 시인을 다시 한번 기억하게 된다. 이육사(1904-1944)의 본명은 이원록이며 경북 안동에서 태어나 중국 베이징 대학에서 공부하였다. 처녀작 <황혼>을 발표하며 문단에 데뷔했다. 이육사는 일제 때 의열단에 가입했다가 투옥되어 붙여진 죄수번호 ‘264’번에서 따온 것이다. 우리 민족의 비운을 소재로 하여 저항의지와 민족정신을 노래한 대륙적이고 남성적인 어조의 시가 많다. 유고 시집으로 <육사시집>, <청포도>, <광야> 등이 있다. 이제 그 시들을 읽어보자. ①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 곳을 범하진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이육사/광야). ②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 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 어데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 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이육사/절정). ③ “내 고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두렴”(이육사/청포도). <광야>는 이육사의 확고한 역사의식에 바탕을 둔 현실극복의 의지가 광막한 공간과 아득한 시간을 배경으로 시화된 작품이다. 특히 투철한 현실인식에서 출발하는 지사정신 자기극복에 바탕을 둔 초인정신, 미래지향의 역사의식 등은 이육사 시의 전반적인 정신이다. 광야의 역사, 암담한 당시 상황과 그 극복의지와 미래지향적 의지를 시간의 추이에 따라 노래하고 있다. <청포도>는 이육사의 대표적 서정시다. 황토색 짙은 시어로 순수성과 시적인식을 뛰어나게 묘사하고 있다. 민족의 수난을 채색하여 끈질긴 민족의 희망을 시화한 이 시의 주제는 신선한 동경과 기다림이라 하겠다. 기다리는 손님이 청포를 입고 찾아올 것이라 믿는 그 마음은 반드시 민족해방의 그 날이 올 것이라는 확신과 기대, 즉 희망적인 관측이 이 시의 성공을 거두는 데 밑거름이 되고 있다. 이육사의 친필 편지가 문화재로 지정됐다. “보내는 그대의 마음도 섭섭한 줄 알았다만은 떠나는 나의 마음은? 안니(아니) 떠나면 안되는 나의 生活, 아! 이것은 現代人의 안니 ‘사라리-멘’(샐러리맨)의 남모르는 悲哀라고나 하여둘가?”(이육사가 1931년 11월 친척 이원봉에게 보낸 엽서) 독립운동가이자 조선일보 기자 등으로 활약한 언론인이었던 이육사의 편지와 엽서자료는 1930년대의 일상적인 안부, 생활고에 대한 걱정, 건강, 기원 등의 근황을 적은 것이다. 시인 신석호와의 우정, 고향을 자주 찾지 못하는 아쉬움, 친척 간의 정을 그리워하는 내용들이 담겨 있다. 이육사는 이퇴계의 14대손으로 전통적인 유가의 집에서 태어났다. <절정>에서도 ‘매운 계절의 채찍’은 일제의 압박을 얘기하는 것이요 ‘북방’은 만주를 가리키는 것이리라. 따라서 이 시는 만주로 망명했을 때의 절망감을 노래한 것 같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이나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고 했으니 그 얼마나 척박하고 삭막하고 가파른 땅인가? “어데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는 의지할 곳 하나 없음을 표현한 것이리라.
김형태 박사
<한남대 14-15대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