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록장편소설] 큰 별(星)이 지다… 춘원의 마지막 길 벽초 홍명희와 재회

Google+ LinkedIn Katalk +

– 춘원이 정말 그런 고귀한 뜻을 가지고 친일을 했다고 믿습니까?

아버님은 아기 같은 면, 영적(靈的)인 면이 있었어요. ‘무차별 사랑’ 같은 불교 사상에도 심취해 있었어요. 광복이 된 뒤에 ‘그게 어리석은 생각이었다’고 고백같은 것을 했어요. 하지만 본인이 이렇게 매도될 줄은 몰랐던 것 같아요. 아버님은 ‘자살을 못한 나로서는 아무 할 일이 없다’고 했으니까요.

– 아버지와 함께한 시간 중에서 무엇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까?

광복된 뒤 아버님이 ‘마음이 괴로울 때 읽어라’며 성경을 주셨어요. 표지 안쪽에다 붓글씨로 자안시중생(慈眼視重生), 모든 중생을 자비롭게 보라)을 썼어요. 마치 자신의 마지막을 예감했던 것 같아요.

6.25 때 우리가 집에서 쫓겨나올 때 인민군이 짐 보따리를 조사해 그 속에 어머니가 감춰둔 돈은 모두 압수했어요. 성경과 염주를 보고는 ‘이런 건 다 쓸데없는 것이에요’라고 말하면서도 되돌려줬어요. 지금도 제가 갖고 있는 아버님의 유품이지요.

– 한국에 들어오면 ‘춘원의 딸’이라고 밝히는 게 쉽지 않지요?

제 전공이 분자생화학인데, 1980년대부터 한국의 대학에서 네 번이나 초빙돼 학생들을 가르친 적이 있었어요.

한 번은 기자가 알고 찾아와서는 ‘사과할 뜻이 있느냐?’고 물었어요. 헌신적으로 학생들을 가르쳐 온 것에 대해 감사하다는 인사는 안 받아도 좋은데, 좀 그렇구나 싶었어요. 

연좌제(連坐制) 비슷한 게 있으니 제 팔자는 민족 앞에서 사과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 섭섭함이 있군요.

세월이 가면서 정리가 됐어요. 아버님을 사랑하는 분들에게는 감사를, 미워하는 분들에게는 사과를 드리고 싶어요. 제 입장을 이렇게 밝히는 것은 처음입니다.

그녀는 기자와의 인터뷰를 이렇게 마치고 있었다. 그녀는 미국서 살면서 1998년까지는 한국 국적을 갖고 있었다. 인도인 독립운동가(작고)와 결혼해 지금 1남 2녀를 두고 있다.

 춘원의 문학과 사상, 그리고 사랑

얼마 전 한국현대문학관에서 한국인물전기학회가 주관한, 춘원 이광수의 생애와 문학사상에서 발표된 서울대 명예교수인 구인환 교수와 춘원의 막내딸 미국 펜실바니아 대학 이정화 교수의 글을 신용철 교수가 요약 정리한 내용이 생각난다.

구인환 교수는 어려운 시대를 겪으면서 문필로서 나라를 다스리자고 한 춘원 이광수를 회상하면서 한 세기가 지난 이 시점에 전집 10권의 방대한 작품과 함께 한국문학의 보고로서 연구와 관심이 증대되고 있다고 말한다.

특히 우리들은 한쪽만의 시각으로 이광수의 문학을 내려깎거나 지나치게 부풀려서도 안 되고 객관적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동안 이광수에 대한 석사, 박사 학위 논문은 현재까지 석사가 120여 명, 박사가 33명이다. 그러나 그 후 그에 관한 논문은 더욱 증가했으며 아직 확인되지 않은 것도 있을 수 있다.

박명애는 이광수를 근대 중국의 유명한 반항적 문인 노신(魯迅, 1881-1936)에 비교하였다. 이처럼 엄청난 연구열과 연구의 양은 바로 춘원 이광수가 이룩한 그의 문학적 업적을 잘 말해주는 것이다.

채수정

 (본명 채학철 장로) 

– 소설가

공유하기

Comments are clo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