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자연에 대한 오류는 그리스도교적 세계관에서 비롯되었다고 화이트(Lynn White)는 그의 글 ‘생태학적 위기의 역사적 뿌리’에서 말하였다. 인간이 창조의 중심이라는 그릇된 세계관은 다른 피조물을 정복하는 창조신학으로 발전하였으며 생태계 위기의 주범이 되었다. 특히 산업사회를 지내면서 이러한 지배의 논리는 자연 정복을 미화하고 심지어 자연 파괴까지 정당화하게 되었다. 산업을 발달시키기 위해서는 기술 산업의 원료로 쓰일 수 있는 자연의 모든 자원을 이용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 1:28)”고 하신 것은 마음껏 파괴하고 지배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보존이라는 의미보다 지배라는 의미로 이해하여 자연 세계에 대하여 인간의 난폭한 힘을 가하여 파괴하였다. 그러나 최근 자연을 지배하고 적대시하던 종래의 세계관은 자연과의 조화와 공존의 입장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에는 환경은 인간의 한 부분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기독교 세계관의 전환은 환경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일반 사회에 대한 사고도 전환되어야 할 것이다.
우선 교회는 환경에 대한 시각이 새롭게 전환되어야 하며 환경에 대한 지배가 아닌 환경과 인간의 공존의 윤리를 정립해야 한다. 환경에 대한 교회의 관심은 단순히 인간학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신학적 의미 즉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차원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세계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은(창 1:31) 하나님의 나라였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게 하소서”라는(마 6:10) 주의 기도를 드리는 우리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할 수 있도록 힘써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주권(Sovereignty of God)이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성품으로 사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는 처음 하나님이 만드신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은 그 나라를 회복하는 일이다.
일반적으로 사회학자들이나 인류학자들은 인간적인 학문 방법론으로 환경문제에 접근한다. 예를 들어 지구는 하나밖에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파괴하는 데는 순간이지만 회복하려면 수십 년 수백 년이 걸리고 혹은 영원히 회복되지 않음을 주지시키고, 후손에게 물려줄 공기나 물이 없어진다고 긴박감을 주고, 그리고 환경은 우리가 후손에게 물려줄 것이 아니라 후손에게 빌려 쓰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접근은 논리적이기는 하지만 인간은 이러한 논리 때문에 환경을 보존하려 하지는 않는다. 반면에 기독교는 신학적인 방법론으로 환경문제에 접근한다. 하나님께서 정복하고 다스리라고 하신 것은 지배하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로 보존하라는 의미로 해석하며 환경에 대한 보존은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복종임을 가르친다. 그러므로 엄밀한 의미에서 환경보존을 가르칠 수 있는 곳은 교회이며 환경보존을 실천할 수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다.
최근에 와서 인류는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환경파괴의 대가를 톡톡히 경험하고 있다. 지구의 온난화로 인한 재앙이 먼 산불이 아니라 우리 앞마당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홍수와 가뭄, 지진과 태풍 등이 지구촌을 강타하고 성경이 말하는 대환란의 전조현상을 보는 듯 마음을 조리게 한다. 올해 우리가 경험한 폭염도 시작에 불과한 것이라고 하니 벌써 내년 여름을 걱정하게 만들고 있다.
지구는 하나의 공동체이다. 문자 그대로 지구촌에 공존해야 하는 인류는 운명공동체이다. 하루에 물 한 동이를 얻기 위하여 6킬로미터를 걸어야 하는 아프리카의 소녀들이 우리의 딸들이며, 해수면의 상승으로 조상 대대로 살아오던 터전인 집이 물에 잠겨 버리고 떠나야 하는 미크로네시아 섬사람들이 우리의 이웃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잘못이 아니라 지배윤리를 방패 삼아 무차별 개발을 일삼던 유럽과 미주, 소위 제1세계 선진국의 잘못으로 말미암아 지구촌 최대의 피해자가 된 것이다.
인류의 공존윤리는 자연과의 관계에서뿐만 아니라 인간과의 관계에서도 발전해야 한다. 전 세계 인류가 마음과 뜻을 모아 우리의 촌을 하나님의 나라답게 조성해 나가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안타까움이 있다. 자연을 파괴하고 지구를 뜨겁게 하는 일은 하나님을 진노하게 하는 일이다. 지금은 전쟁을 통하여 어느 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지배할 때가 아니다. 속히 전쟁을 종식하고 지구를 살려야 할 때이다. 지금은 싸움을 통하여 어느 한 이념이 다른 이념을 지배할 때가 아니다. 속히 싸움을 종식하고 자연을 살려야 할 때이다. 지금은 투쟁을 통하여 어느 한 집단이 다른 집단을 지배할 때가 아니다. 속히 투쟁을 종식하고 환경을 회복할 때이다. 어느 때나 전쟁과 싸움과 투쟁은 패배자만 있을 뿐이었다. 자연에 대한 지배윤리의 온전한 반성이 지구촌 인류에 대한 공존윤리로 발전할 것이다.
이성희 목사
<증경총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