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 고아들의 벗, 사랑과 청빈의 성직자 황광은  목사 (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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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 보이스 타운 < 3>  크리스챤 신문 및 대광학교 ①

평생 동안 남을 위해 희생하는 삶

도움 받는 것 오히려 고통스러워해

아동문학 정열, 작가로서 높은 소질

빛 따르는 ‘해바라기회’ 모임 결성

너무나 고결하고 청빈하게 사시다가 가신 분! ‘인간 황광은’을 읽다 말고 얼마나 감격했고, 얼마나 눈물을 닦았는지 아십니까. 그 책을 읽으면서 그리고 읽고 나서도 우리의 현실 교회와 교역자들의 생활상을 대조해 보면서 오늘의 교역자들에 대해 낙심도 하고 그들을 꾸짖고 싶은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기름 부음을 받은 분들을 치지 말라’는 어머니의 유언을 생각하며 벙어리가 되어 냉가슴을 앓고 있습니다.

거듭 말하지만 황광은 목사님은 잊을 수 없는 성자이십니다. 그분은 평생 동안 남을 위해 도와주실 줄만 알았지 어떠한 형태로든지 도움을 받는 것을 무척 고통스럽게 여기고 상심하셨습니다. 그런 분이 이 세상 어디에 또 있겠습니까. 황 목사님의 생활 태도에 다시금 머리를 숙이게 됩니다.

이같은 고결한 성자가 되도록 내조하신 사모님께서 바로 김관식(金觀植) 목사님의 따님이시란 사실을 알고 난 후부터는 황 목사님이 어떻게 그렇게 청빈하고 고결하게 살 수 있었는지 깨달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김관식 목사님의 따님인 이상 무슨 말을 더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나의 어머님께서는 김 목사님을 무척 존경하셨습니다.

‘해바라기회’

황광은 목사는 어릴 때부터 예술에 소질이 있었다. 그의 동생 황정은 장로의 추억에 의하면 황광은 목사가 고향 교회의 소년면려회 회장을 하면서, 어느 크리스마스 때 성극 각본을 써서 주연과 감독까지 했다고 한다. 그는 노인 배역을 맡았는데, 자신이 작사 작곡한 노래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었다는 것이다.

“오늘은 즐거운 크리스마스, 늙은 이 몸 주의 은혜 넘쳐 흐르네. / 머리에는 흰꽃이 만발하였고, 성은 이미 허물어져 구멍뿐일세. / 무쇠 팔뚝 두 주먹을 휘두른 때도, 저 산 밑에 외로 한 줌 안개가 되고, / 허무하다 인생이여 너의 갈 길은, 서러움의 산이요 눈물의 바다. / 그러나 나는 이제 꿈을 깨었소. / 만왕되신 예수님을 굳게 붙들고 / 십자가에 달린 예수 날 오라기에, 나는 가네 천성으로 세상 버리고.”

황정은 장로는 형에게 “성은 이미 허물어져 구멍뿐일세”가 무슨 뜻이냐고 했더니, 형은 “사람은 젊을 때 마치 돌로 성을 쌓은 것 같은 이빨을 가지고 있으나, 늙으면 빠져서 간격이 생긴다는 뜻이다”라고 설명해 주었다.

새문안교회 부목사로 일하는 동안 황광은 목사는 아동문학에 정열을 쏟게 되었다.

원래 그에게는 작가로서의 소질이 많았다. 그러나 고아들과 함께 바쁘게 뛰다 보니 변변히 시간을 내서 작품을 쓸 시간이 없었다. 그런데 이제 억지로 애를 쓰면 작품 활동을 할 수 있는 시간을 벌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래서 자주 만나게 된 것이 뛰어난 구연동화가요 아동문학가인 안성진(安成鎭) 목사였다. 그리고 그와의 만남은 황 목사로 하여금 좀더 문화 활동에 적극 참여할 수 있는 계기가 되게 해 주었다.

“내가 황 목사와 처음 만난 것은 1955년, 종로 2가에 있던 장안빌딩에서였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그 분은 선이라고 인정될 때는 계획도 없이 그저 무조건 나간 사람입니다. 그러다가 해명할 길이 없을 때는 몸을 바쳤습니다.”

지금은 미국 워싱턴 주에 이민가 있는 안성진 목사가 잠시 귀국했다가 필자를 만나 한 이야기이다.

“그때는 한국동란의 상처가 채 가시기 전이라. 한국 사회는 그를 받아들일 만한 곳이 없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같이 안정된 때였다면 문제는 다를 것입니다.” 동석했던 아동문학가 유영희(劉永熙) 장로의 말이었다.

그들은 상처 투성이인 이 땅의 어린이들에게 꿈을 심어 주어야 하겠다고 마음먹게 되었다. 그래서 어린이들을 사랑하고 문학을 이해하는 교계 인사들이 한데 모여 모임을 이룬 것이 해바라기회였다.

1957년에 안성진 목사가 경영하던 기독교 아동문학사에 모여 그 발기식을 가졌는데, 회원은 다음 아홉 명이었다. 박윤삼, 안성진, 오기선, 유영희, 이봉구, 이태선, 최영일, 최효섭, 황광은.

빛을 따른다고 해서 모임의 이름이 ‘해바라기회’로 되었다. 회원은 최소한 1년에 작품 한 편 이상씩 발표하기로 했고, 1년에 해바라기회의 이름으로 동화집 한 권씩을 내기로 했다.

그들이 지향한 것은 황 목사가 지향한 것이나 마찬가지의 것이었다. 정치적인 데서 떠나 어린이와 같은 마음으로 살아가기를 지향했다. 그러니 자연 아동문학에서의 어떤 테크닉보다는 심적인 동지들이 되었다.

그 무렵의 황 목사를 안성진 목사는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그는 해야 하겠다고 결정을 내리면 후퇴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지요. 앞에 강이 가로막고 있는 것도 모르고 무조건 나아가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누구도 그의 뜻을 꺾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의 뜻을 굽히게 하기 위해서는 더 멋진 대안을 내놓아야 했습니다.”

한 마디로 그는 외유내강의 사람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사실은 본인 자신이 알고 있었던 듯하다. 그러기에 50년 대에 제주도에 있을 때 ‘우신(牛臣)’이란 말을 자신의 호로 썼고, 소년시 출신 청년에게 편지를 쓰면서도 느려도 ‘황소 걸음’이란 말을 쓰고 있으며, 뒷날 대광 교목 시절에도 ‘대광은 황소’란 표현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황 목사 하면 내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그 천진스러운 미소요.”

그 무렵 오랫동안 어린이 월간지 <새벗>을 편집한 바 있던 마상조(馬相助) 씨의 회고다. 얼핏 보기에 여리게만 느껴지던 황 목사, 그는 이런 황소 같은 성격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김희보 목사

· ‘人間 황광은’ 저자

· 전 장신대 학장

· 전 한국기독공보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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