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든 가족이든지 누군가 병에 걸려 고생하고 있다. 생명의 기한이 얼마 남지 않음을 인지한다면, 살고 싶은 마음이 깊은 곳에서부터 더 간절해질 것이다. 모든 것을 다 잃더라도 질병의 공포와 고통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다른 것들은 다 포기할 수 있을 것 같다. 하나님의 은혜로 건강해지는 기적이 이루어진다면 예수를 잘 믿는 사람이 되겠다는 다짐을 수없이 한다. 그래서 남모르게 지난날을 회개하며 병을 낫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이 병만 낫게 해 주신다면 정말 신앙생활을 잘하겠다고 결심한다.
예수님 당시에도 종교 지도자들은 기적을 보여 달라고 요구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저들을 향해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책망하셨다. 권력자들도 기적을 요구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 요청을 거절하셨다. 인간의 능력이 한계 상황에 이르고, 어려운 곤경에서 헤어나지 못할 때 우리는 기적을 바라게 된다.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해결되기를 원한다.
사탄은 예수님을 시험했다. 예루살렘의 성 위에서 ‘뛰어내리라’고 했다. ‘돌덩이를 떡이 되게 해 보라’고 유혹했다. 예수님은 모두 거절하셨다. ‘거룩한 억제’이시다. 하나님은 강압적 순종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먼저 사랑을 바라시고 자유 의지에 의한 순종을 원하신다. 예수님은 우리 구원을 위하여 사람이 되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사 힘들고 어렵고 느린 길을 선택하셨다. 오직 사랑하심이다. 제자들을 강제로 모으지 않았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신 동시에 사람이셨다. 그러나 하나님의 신성을 완전히 나타내지 않으셨다. 권능으로 사람을 위압적으로 대하지도 않으셨다. 공관 복음서에는 약 30여 가지의 기적이 기록되어 있다. 과연 이러한 많은 기적이 예수님을 향한 믿음을 만들어 냈는가? 믿음으로 이어졌는가? 믿음으로 승화되었는가? 예수님께서는 구약 시대에 모세와 엘리야가 일으킨 기적의 영향력이 별로 크지 않았음을 잘 알고 계셨다. 며칠이 못 되어 예수님을 따르며 많은 기적을 목격한 군중은 빌라도 법정에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무례한 자들이 되지 않았는가!
하나님께서는 기적이 아닌 ‘순종과 희생’에 바탕한 믿음을 원하신다. 하나님을 사랑할 것과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신다. 자유에 의한 선택을 원하신다. 성경은 기적이 믿음을 만들어 내지 못한다고 가르친다. 갈멜산의 불이 우상숭배를 막아내지 못했다. 변화산의 기적을 목격한 베드로, 야고보, 요한에게 어떤 선한 영향력을 끼쳤을까? 모든 의문이 사라지고 믿음이 강해졌는가? 아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가장 필요로 할 때 그들은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다.
기적은 예수님을 믿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믿음을 더욱 강화시켜 주지만 예수님을 부인하거나 믿지 않으려는 사람들에게는 하등의 도움이 되지 못했다. 빌라도 법정에서 기적은 제한되었다. “선지자 노릇하라”, “너를 치는 자가 누구냐?” 날아오는 것은 주먹이었다. 침 뱉음이었다. 아무 저항도 하지 않으셨다. 군중이 뱉은 침이 턱 밑으로 흘러내렸다. 예수님을 따랐던 여인들, 어둠 속으로 도망쳐 숨어 버린 제자들도 기적을 원했다. 구경꾼들은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 그러면 우리가 믿겠다”고 조롱했다. 하나님의 구원 즉 기적은 없었다. ‘침묵하시는 하나님’.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셨다.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신은 구원하지 못한다”고 야유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믿으라고 결단코 강요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주셨다. 자발적으로 그 분께 나아오도록 하셨다. ‘독생자를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내어 주신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에 우리는 믿음의 기초를 둔다. 사랑은 희생이 있을 때 설득력을 가진다. 사랑과 믿음, 희생과 헌신은 자발적 의사의 선택에 의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자유 의지에 의한 사랑과 선택을 원하신다. 기적에 의한 믿음은 뿌리가 없는 식물과 같다. 인내는 역경을 영광으로 바꾸는 능력이다.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는 자는 참음으로 기다려야 한다.
김용관 장로
<광주신안교회·한국장로문인협회 자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