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위량의 제 2차 순회 전도 여행 (33)
청도에서 대구까지(17)
배위량은 대구에서 한옥으로 이루어진 넓은 집에 터를 잡았다. 그곳에서 대구 경북지역 최초의 교회와 최초의 학교와 최초의 병원이 생겼다. 이런 점에서 대구에서 배위량의 선교는 문화 친화적이었다. 지금은 최초의 ‘그 교회’도 최초의 ‘그 학교’도 최초의 ‘그 병원’도 우리 곁에 없지만, 그 사실이 사진과 글 속에 남아 있다. 그 역사적인 흔적들을 더듬어 볼 때 배위량의 선교와 한국 문화의 연결을 시도해 보는 것이 재미있을 것 같다.
필자는 30대 중반에 유럽의 오스트리아 선교사로 일한 적인 있다. 당시에 같이 선교사로 일한 동료들 중에는 아프리카나, 중동 지역에서 일한 분도 많았지만, 유럽에서 일한 선교사들도 많았다. 선교사가 어디서 일하든 자신이 일하는 지역을 알아야 선교를 효율적으로 할 수 있다. 유럽에서 일하는 선교사들은 한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일이 대부분이지만, 어떤 분들은 유럽에 있는 타종교인들과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선교를 한다. 목회자나 선교사가 자신이 일하는 지역사회의 환경을 바르게 인식해야 그 지역 사회와 더불어 살아가는 그 지역민을 위하여 효과적으로 일할 수 있다. 농촌이나 어촌에서 일하는 사람은 농촌이나 어촌의 실정을 알아야 되고 도시에서 일하는 그 도시의 실정을 알아야 한다.
오랜 기간이 아니었지만, 배위량은 대구에서의 자신의 삶을 한옥에서 시작했다. 그는 많은 시간 동안 부산에 거주하면서 한반도 남부 지역 특히 동쪽 지역을 위하여 여러 번 순회 전도 여행을 다니며 당시의 한국 실정을 익히고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에게 자신이 귀하게 여기는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선교 여정을 이어갔다. 배위량이 부산에서 거주할 때는 서양식 건물에서 거주했지만, 순회 전도를 나가면 당시 한국 땅에 존재한 거의 모든 집들은 한옥이었기에, 배위량은 기와집이나 초가집에서 잠을 자고 밥을 먹고 그곳에서 쉬기도 하고 그곳에서 사람을 만나고 전도도 했다. 그런 선교 여정에서 배위량은 한옥에 대하여 어떤 마음을 가졌을까? 지금은 도시나 농촌에서 한옥 보는 것은 쉽지 않다. 대부분의 건물이 서양식 건물이다. 물론 서양식도 아니고 한옥도 아닌 건물도 있다. 한옥을 재건축하면서 겉은 한옥인데 내부는 현대식 구조로 바꾼 경우도 있다. 한옥에 살다가 현대식 건물로 이사를 하거나 한옥을 허물고 그 자리에 서양식 건물을 짓기도 한다.
사람에게 집은 그의 삶의 방식과 닮아간다. 아파트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그 공간에서 독립된 개체로 최소 단위로 타인의 간섭 없이 자신의 꿈을 가꿀 수 있다. 그러나 한옥은 자신의 독립성보다도 타자와의 관계를 우선시해야 할 경우가 많다. 필자가 태어난 곳은 대문도 없는 초가였다. 아주 어린 시절에 그곳에서 자랐기에 그 초가에서 살았던 기억은 골목에서 동무들과 놀았던 기억 밖에 없다. 조금 철이 들 무렵 우리 집 앞에서 보면 바로 대문이 보이는 기와집으로 이사를 갔다. 대부분의 어린 시절 기억은 그 기와집에서 생활했던 일들이다. 필자의 할아버지는, 아버지가 어린 시절에, 거창군 가조면에서 살던 가족을 이끌고 가장 가까운 친척이 살았던 충남 공주로 이사를 갔다. 그곳에서 잠깐 살다 성주군 수륜면 백운동으로 이사를 가서 살았다. 어린 시절 우리 집 본적이 성주군 수륜면 백운동 1494번지여서 아버지께 여쭈어 보니 아버지께서 청년 시절 수륜에 살 때 호적을 정리하게 되어 그곳이 고향이 아니지만, 본적이 되었다고 한다. 다시 고령군 우곡면 사촌동 황성마을로 이사를 와서 살다가 어린 시절 그 마을 98번지 기와집으로 다시 이사를 했던 것이다.
우리 집은 본채와 사랑채가 연결된 구조의 1동짜리 큰 건물이 아니라, 본채와 사랑채가 연결되지 않았지만 바로 옆에 붙어 있는 구조의 건물이었다. 본채는 4칸짜리 건물로 부엌과 대청마루 그리고 방 두 칸이 있었고, 아래채는 사랑방과 대문간 그리고 외양간으로 이루어진 3칸짜리 반짜리 집이었다. 그런데 본채와 사랑채가 독립된 건물이었지만, 가까이 붙어 있었고, 사랑방 옆에는 미닫이 문으로 된 작은 방이 붙어 있었으니, 사랑채는 3,5칸짜리 집이었다.
필자의 아버지는 양반집에서 태어났지만, 가정이 빈한하여 공부를 못하셨다. 결혼 후 얼마 뒤 일본에 징용으로 끌려가서 북해도 탄광에서 갖은 고생을 다하다가 해방된 뒤에 가족이 있는 고령으로 돌아오셨는데, 아버지가 일본 탄광에서 일하시는 동안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셔서 할머니와 어린 꽃 각시였던 어머니는 남의 밭도 매주고, 바느질도 하면서 연명하시다가 아버지가 한국에 오신 후 머슴살이를 하여 집을 일구시고 집도 장만하시고 논밭도 구입하시며 집안을 일구셨다. 어린 시절 우리 마을은 총 가구가 11집이 사는 작은 마을이었다. 이웃 마을과 많이 떨어져 있었다. 우리 마을에서 우리 집만 유일하게 기와집이었고 다른 집들은 모두 초가집이라 나는 우리가 세상에서 가장 잘 사는 줄 알았다. 우리 아버지가 지게를 지고 머슴살이를 하셔서 일군 우리 집에는 나무로 된 대문이 있었고, 마당도 넓었다.
강 건너 외가에는 사립문이 있었다. 사립문은 문이지만, 안과 밖을 표시만 했을 따름이지 안과 밖을 동일시하는 문이다. 사립문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사립문 밖에 있는 사람들도 다 보고 듣는다. 사립문 밖에서 일어나는 일을 사립문 안에 있는 사람도 다 보고 듣는다. 이렇게 우리 선조들은 온 마을이 한 가족처럼 살아가는 지혜를 터득했던 것 같다. 방안으로 들어가도 방문이 창호지로 바른 문이라서 그 방안에서 큰 소리를 치면 밖에 있는 사람이 다 듣는다. 문을 닫고 있어도 이웃집 개 짖는 소리, 닭 우는 소리를 다 듣는다. 어느 집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감출 수가 없다. 그런 점에서 보면 한옥은 인간과 자연을 이어주는 자연친화적인 구조인 것 같다. 그리고 한옥은 나와 너를 구분하지 않고 우리로 이어준다.
어린 시절은 배곯고 못 먹는 사람도 많았다. 우리 할머니와 어머니는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일본에 징용으로 끌려가 계시는 동안 땅 한 뼘도 없이 사시며 갖은 고생을 하신 경험 때문인지 친척들이 찾아오는 것을 다 받아 주셨다. 그들은 우리 아버지께서 사대 외동아들이시라, 가까운 친척은 없었고 족보에 들지 않는 먼 친척이었다. 특히 겨울철이면 외가 친척, 친가 친척, 할머니 친정 친척들이 차례로 온 가족을 이끌고 한 방씩 차지하고 겨울 내도록 우리 집에서 기거하신 후 아이들 방학이 끝나면 각자 집으로 돌아가셨다. 어린 우리들이야 친구들이 생겨 좋았지만, 할머니와 어머니는 여간 고생을 하셨을 것이다. 지금 같으면 한 가족이 기거하기도 벅찰 텐데 어떻게 그런 대가족이 그 집에서 살았을까 싶기도 하다. 그런데 여기에 한옥의 신비한 비밀이 있지 않을까 싶다. 그것은 한옥이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자연친화적인 가옥인데 있다. 지금과 같은 아파트에 그렇게 많은 사람이 있다면 하루 저녁도 함께 있기가 어려울 듯하다. 한옥은 집안에 있어도 우주를 꿈꿀 수 있는 공간이고 집 밖에 있어도 집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아차릴 수 있다.
배위량은 부산에서 선교 사역을 시작하면서 당시로서는 가장 현대적인 서양식 건물을 지었지만, 대구에서는 정완식 씨 소유의 넓은 집을 사서 그 한옥에서 선교사의 삶을 시작했다. 물론 나중에 후임 선교사들이 그 터전에 너무 좁고 불편하여 대구 동산으로 선교 터전을 옮겼지만, 대구 경북의 선교 시작은 한옥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엄연하다. 만약 배위량이 순회전도를 다니지 않고 부산에서만 살았다면 자신이 건축한 선교의 터전을 떠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영남지역 일대를 순회 전도하면서 선교일을 위해서 영남지역의 중심으로 선교의 터전을 옮길 필요성을 인식했고, 그가 순회 전도하는 동안 한옥에서 먹고 자고 사람들을 대하고 전도도 하고 이야기도 하고 하면서 이방인이었던 배위량이 한국인의 집인 한옥의 가치를 은연중에 느낀 것은 아닐까?
그가 느꼈든 느끼지 않았든 그는 자신의 영남 선교를 위한 교두보를 한옥에 두었다. 그런데 대구 경북선교의 교두보였던 그 최초의 교회, 최초의 학교와 최초의 병원이 한옥에서 시작했지만, 그 건물이 지금 어느 곳에도 없다는 것이 아쉽다. 그것들을 다시 회복한다면 중요한 역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들이 지금은 대구에 없다는 것이 못내 아쉽다.
배재욱 교수
<영남신학대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