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 믿음으로 한국 땅에 뛰어든 배위량 목사 (60)(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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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위량의 제 2차 순회 전도 여행 (39)

대구에서 구미까지 (3)
이상규는 『숭실의 설립자. Dairy of William M. Baird 1892.5.18.-1895.4.27. 윌리엄 베어드 선교일기』의 1893년 4월 25일 아침에 동명지에서 쓴 일기에 “The servans reported snow on the haills this morning”을 “하인들은 오늘 아침에 언덕 위에 눈이 내렸다고 말해 주었다”로 번역한다. ‘하인’으로 번역된 ‘servant’는 배위량과 동행한 사람들을 지칭한 말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지칭한 말일까? 배위량이 자기와 함께 한 사람들을 지칭하여 ‘servant’라고 했다면 이 ‘servant’를 ‘하인’으로 번역하는 것이 바른 번역일까란 생각을 하게 된다. 배위량이 1893년 4월 14일을 부산을 출발하여 동래에 도착하여 17일에 동래에서 14일 일기를 쓰면서 자신과 함께 서경조가 ‘전도인’(‘evangelist’), 박재용이 ‘심부름꾼’(‘boy’)으로 자기와 함께 동행하게 됨을 말한다. 그리고 ‘마부’(‘mapoo’) 두 사람이 함께 한다는 것도 밝혔다. 배위량은 서경조와 서상륜을 ‘전도인’으로 순회전도 여행을 위하여 자기와 동행하도록 요청했다. 그들은 번갈아 가면서 배위량과 동행하면서 전도인으로 그를 도와 주기 위하여 황해도에서 부산까지 왔다. 배위량은 4월 14일 일기에서는 그들 4인을 ‘servant’라는 이름으로 지칭하지 않고 ‘evangelist’, ‘boy’ 그리고 ‘mapoo’라고 각각 지칭했다. 그런데 4월 25일 일기에서는 ‘servant’라는 명칭을 사용하여 어떤 사람들을 표현한다. 4월 25일에 배위량이 ‘servant’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이 서경조, 박재용 그리고 마부 두 사람을 지칭했는지, 아니면 동명지 주막에서 일한 ‘하인들’을 말한 것인지가 불분명하지만, 25일 일기에 “우리는 어제 아침 일찍 대구를 떠나려고 했지만, 이동하는 일은 마부의 재량인데, 마부들이 말을 교체해야 했다. 그래서 우리는 정오가 되어서야 다른 더 좋은 말을 갈아타고 이동하여 대구에서 40리 떨어진 이곳으로 왔다.” 는 말로 마부를 신뢰하고 자신의 순회 전도 여행길을 마부의 판단을 신뢰하는 것을 보면, 마부 2인만을 지칭하는 말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되지만 ‘servant’는 마부를 포함한 4인(서경조, 박재용, 마부 2인)을 지칭하는 명칭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마부가 길 안내와 관련된 조언을 주로 하는 사람이겠지만, 길을 나선 사람들에게 모든 사람의 견해가 중요한 결정의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이런 견해로 필자는 배위량과 함께 순회전도 여행에 동행하는 모든 사람들을 ‘servant’라는 명칭으로 표기했다고 본다. 이 경우 ‘servant’라는 명칭을 ‘하인’으로 번역하는 것이 관연 적당한 번역일까 생각하게 된다. 영어 ‘servant’는 ‘하인,’ ‘종’과 같은 뜻을 기본으로 가진다. 그러나 ‘servant’는 ‘고용인,’ 또는 ‘종업원’으로도 번역이 가능하다. 배위량은 4인을 하인으로 고용했다기 보다는 일시적으로 도움을 받기 위하여 ‘전도인’과 ‘길 안내인’으로 각각 요청하거나 고용한 사람들이다. 물론 그 당시 조선 땅에는 신분 제도가 존재하여 귀족과 평민 신분인 상민(常民)이 엄격히 분리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평민 계급 보다 더 아래 신분인 천민들은 더 열악한 상황이었다.

조선 땅에 선교사로 온 배위량이 전도하기 위하여 먼 길을 떠나면서 노중(路中)에 도움이 되도록 자기를 도와주도록 멀리 황해도에서 부른 서경조와 길 안내자로 부른 마부를 ‘종’이나 ‘하인’으로 인식하여 그들을 ‘servant’라고 지칭한 것 같지는 않다. 배위량이 그들을 아랫사람 대하듯 했고 그래서 그들을 ‘servant’라고 지칭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배위량이 해야 할 일에 도움이 되도록 그들을 불렀기에 ‘servant’를 ‘하인’으로 번역하기 보다는 ‘집사(執事)’ 또는 ‘협력자’라고 번역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그것은 ‘servant’를 ‘하인’으로 번역할 때 독자들은 배위량을 권위적인 사람으로 인식하기 쉬울 것이다. 그리고 당시 자기를 도와주도록 고용한 사람들과 순회 전도 여행길에 도움을 받기 위하여 황해도에서 부산까지 불렀다. 그리고 그는 서경조와 함께 멀고먼 전도여행길을 떠났다. 그런 배위량이 서경조 같은 사람을 아랫사람 대하듯 대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렵다. 그것보다는 그들 자신의 동역자로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빌레몬의 종이었다가 그로부터 도망을 친 후 바울에게 와서 함께 했던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돌려보내면서 바울은 “이후로는 종과 같이 대하지 아니하고 종 이상으로 곧 사랑 받는 형제로 둘 자라”(ouvke,ti w`j dou/lon avllV u`pe.r dou/lon( avdelfo.n avgaphto,n, 몬 1:16)라고 했다. 이 구절에서 바울이 오네시모를 “종과 같이 대하지 아니하고”(ouvke,ti w`j dou/lon), “종 이상으로”(avllV u`pe.r dou/lon) 그리고 “사랑 받는 형제로 둘 자”(avdelfo.n avgaphto,n)로 표기했다는 사실에 주목을 하게 된다. ‘우케티 호스 둘론’(ouvke,ti w`j dou/lon)은 “더 이상은 종이 아니라”는 의미를 가진다. 그렇다면 바울은 오네시모를 어느 경점부터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종 이상의 인물’(avllV u`pe.r dou/lon), 즉 “사랑 받는 형제”(avdelfo.n avgaphto,n)로 생각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구절에 바울의 깊은 인간 이해를 볼 수 있다. 빌레몬서 1장 16절에 나타난 바울의 인간학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를 동등한 자유인 즉 형제로 본다는 것에서 파악할 수 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가 이루기 원하셨던 하나님 나라 국민의 참된 모습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이해했던 인물이다. 고린도전서 9장 19절에서 바울은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고 했다.

배위량의 일기에 나타나는 ‘servant’를 ‘하인’이라 번역한다면 부르며 하대한 것으로 판단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배위량이 사용한 ‘servant’ ‘하인’으로 번역한 것은 적절한 번역이 아니라고 판단된다. 배위량은 마부까지도 인간적으로 대하며 존중하고 아껴 준 것을 자신이 쓴 일기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1893년 4월 25일에 쓴 일기에 “우리는 어제 아침 일찍 대구를 떠나려고 했지만, 이동하는 일은 마부의 재량인데, 마부들이 말을 교체해야 했다. 그래서 우리는 정오가 되어서야 다른 더 좋은 말을 갈아타고 이동하여 대구에서 40리 떨어진 이곳으로 왔다”는 말은 그가 마부를 길 안내의 전문가로 인정하고 그들의 말을 신중히 듣고 그들의 판단을 존중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뿐만 아니라, 배위량은 마부들의 의견을 존중해 주고 그들의 판단에 따라 움직인 사례를 여러 번 일기에 적고 있다. 마부들이 다 완전한 사람이겠는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들도 인간적으로 모나고 약점이 있었을 것이다. 문제는 그들의 전문성을 받아들였고 그들의 그러한 판단을 배위량이 인정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배위량은 순회 전도 여행을 시작하면서 여러 사람과 함께 길을 떠났다. 배위량은 함께 했던 사람들의 전문성을 인정해 주고 그들 각자가 해야 할 일을 맡기고 자신은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열중했다. 그것은 그들은 모두 함께 해야 할 공동체이었기 때문이다. 이 공동체에서 배위량은 그 공동체의 지도자로 그들을 이끌고 자신이 계획한 목적을 이루어야 할 위치에 있는 사람이다. 만약 배위량이 그 공동체의 장(長)인 자신의 신분만 생각한다면 공동체가 추구하는 일을 바르게 이루기가 사실상 대단히 어렵다. 배위량은 수족같이 움직여 주어야 할 함께 하는 사람들과 함께 길을 떠났다. 그런 상황에서 만약 공동체의 지도자인 배위량이 소속된 사람들을 하찮게 여겼다면 그들은 즐겨 일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면 그들의 도움을 받아야 자신이 목표한 일을 이룰 수 있는 배위량이 순회 전도를 통해 자신이 목적하는 바를 이룰 수가 없을 것이다.
배위량이 길에서 일어난 일을 보도하는 그의 일기에 보면 그는 자신과 함께 움직이는 사람들과 함께 여러 가지 힘든 일을 극복한 것으로 보인다. 인간은 모두 각자 고해(苦海)와 같은 현장 속에서 인생을 살아간다. 배위량이 순회 전도 여행을 행하는 와중에도 세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무수한 일들이 그 공동체 속에서 일어났을 것이다. 그것을 어떻게 극복하는 가가 중요하다. 그런데 배위량은 함께 한 사람들을 살뜰히 챙겼고 함께 한 사람들도 배위량을 신뢰하고 따랐다. 이런 점은 그와 함께 했던 사람들을 통하여 보게 되는 배위량의 모습이 크게 보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배재욱 교수
<영남신학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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