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 전 6.25전쟁은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주고 있다. 북한 공산군의 침략으로 3일 만에 서울이 함락되고 정부가 대전을 거쳐 부산으로까지 옮겨가는 동안 국민들은 불안했고 관료들은 전전긍긍했을 뿐 뾰족한 대책이 없었다. 만일 미국을 비롯한 유엔의 도움이 없었다면 우리 대한민국은 그때 지구상에서 없어졌을 것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경험한 민족이지만 또다시 일본 침략과 공산군의 침략까지 당하는 불행을 겪어야 했다. 이런 민족의 수난이 또 어디 있겠는가!
공산당의 치하에서 3개월 살아보니 생지옥이 따로 없었다. 그때 당해봐서 그랬는지 우리가 압록강까지 진격했다가 중공군의 개입으로 다시 후퇴를 거듭하고, 두 번째로 서울까지 빼앗기는 위기에 처하게 되자 주일(駐日) 대표부의 김용주(金龍周) 공사는 크리스마스 캐럴이 울려 퍼지는 1950년 12월 24일 저녁, 조국을 구할 거창한 계획을 세우느라고 밤을 새웠다. 20페이지 분량의 극비문서이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조국을 걱정한 나머지 스스로 판단하고 혼자 작성하여 요로에 보고한 기막힌 문서가 있었다. 필자는 그 문서를 ‘페이퍼 엑소더스(paper exodus)’라고 부른다.
1950년 12월, 동부전선에서는 중공군의 대공세로 미 해병 1사단이 장진호전투에서 중공군 9개 사단에 포위되었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직후, 부산으로 철수명령을 받고 흥남철수작전을 진행하고 있었고, 서부전선에서는 서울을 포기하는 1·4후퇴를 진행하고 있던 때였다. 서부전선이나 동부전선이나 어디에도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미 합참에서는 8군 사령관에게 한국을 포기하고 철수할 것에 대비하라는 지시까지 내려진 상황이었다. 그때 주일공사는 본국의 훈령이 없는 상태에서 망명정부안을 계획했던 것이다.
『한국의 전황이 여의치 않을 경우, 주요 인사를 포함하여 대략 100만 명을 일본으로 철수시켜 차후를 기약하자는 내용』이었다. 실제로 정부는 서울 시민들에게 피난명령을 내리고 서울을 버려야 하는 절박한 순간이었다. 중공군의 공세가 생각보다 강하자 미국이 한국을 포기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삽시간에 퍼졌다. 그때 김 공사는 다음과 같은 비밀 작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① 한국인 대피 장소는 규슈(九州) 사세보(佐世保)항 부근 ② 수용할 건물은 일본 정부가 제공 ③ 한국 피난민의 생활은 재일동포와 기타 원조에 의한다. ④ 철수할 요인, 피난민, 군대 등은 당국의 협조로 수송한다는 내용이다. 김 공사의 이런 계획서는 파우치 편에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내어져 재가를 기다리게 되었다. 또 김 공사는 12월 22일 유엔군사령부 힉키(Doyle Hickey) 참모장을 비롯하여 여러 장군들을 만나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
이와는 달리 실제로 한국 정부의 일시적 망명계획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정일권 육군참모총장의 회고록에 의하면, 9월 7일 낙동강 방어선이 최고조의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워커 장군(미8군 사령관)으로부터 영천(永川)마저 뚫린다면 전황이 악화되어 부산 교두보까지 함락될 우려가 있으니, 이런 경우에 대비하여 한국군 정예부대 2개 사단과 주민 필수인원 최소 10만 명을 일본 또는 하와이로 일단 소개시킬 수 있도록 준비하라는 지시를 받고 은밀하게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고하자 『대통령은 노발대발, ‘갈 테면 너희나 가라’고 추상같은 꾸중을 들었다』고 회고했다.
한편 한국 정부로부터 답을 기다려도 오지 않자 김 공사는 1951년 1월 8일 부산으로 건너와 이승만 대통령을 만났다. 대통령은 「임자는 왜 허락도 받지 않고 임지를 떠났느냐고 야단치며 빨리 돌아가라」고 호통쳤다. 미 합참에서는 낙동강 방어선이 무너질 것에 대비하여 유엔군은 일본으로 한국군은 주변 도서(제주도)로 철수할 계획을 검토한 바 있으나 트루먼 대통령의 결단으로 현상유지로 결론지었다. 김 공사의 엑소더스 프로젝트는 생각할수록 과잉 충성이요 허망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위급한 사태가 오지 않도록 철저히 대비하는 범국가적 안보태세가 필요하다.
배영복 장로<연동교회>
• 한국예비역기독군인연합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