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 믿음으로 한국 땅에 뛰어든 배위량 목사 (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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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위량의 제 2차 순회 전도 여행 (63)

구미에서 상주까지 (11)
구미시 해평면 일선리는 안동 임하댐의 수몰지구에서 옮겨온 이주민들의 마을이다. 안동과 구미는 거리상으로 상당히 멀지만, 임하댐 수몰지구의 마을 사람들을 위해 ‘낙동강 둔치에 새로 만든 농지’를 마련하여 이곳으로 이주시켰다. 그때 그 마을의 여러 문화재들도 함께 이곳 구미시 해평면 일선리로 옮겨왔다. 그래서 구미에서 전통적인 안동 고유의 문화를 체험할 수 있다. 임하댐 수몰지구 이주민들이 대대로 터잡고 살았던 정든 고향을 등지고 멀리 구미의 한적한 시골 땅으로 이주한데는 땅에 대한 애착심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정든 고향을 떠나기 싫어하는 심성은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일 것이다. 그렇지만, 자신의 희망에 따라 고향을 떠나 자신의 미래를 개척하고자 하는 마음이 더 클 때에는 그 희망을 따라 고향을 떠날 수도 있다.
임하댐 수몰지구의 토지 대가를 보상받아 고향 가까운 도시에서 살수도 있었지만, 임하댐 수몰민들은 도시나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길 원치 않고 자신들이 살던 마을 자체를 옮겨 오는 것을 더 원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마을 사람들과 함께 고향집을 구미시 해평면에 복원하고 자신들이 가치를 두고 살아 왔던 것들을 옮겨와 구미에서 마을을 이루고 살고 있다. 그래서 일선리에 가면 안동지역의 옛 향취가 물씬 묻어 난다. 그들이 고향을 떠나면서까지 집단으로 이주했던 것에는 이웃에 대한 정리(情理)를 귀중하게 지키고자 하는 마음과 조상들이 전해준 것들을 아름답게 지키고 가꾸고자 한데 있는 것이 아니었던가 생각된다. 그래서 그들은 이웃이 뿔뿔이 흩어지는 것을 원치 않고 멀리 고향을 떠나지만, 함께 마을을 이루고 조상적부터 귀중하게 지켜온 자신들의 가치를 후세에 전하고자 하는 마음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고향을 떠났지만, 이웃과 함께 마을을 이룬다면 그것은 새로운 고향이 된다.
일선리 이주민들은 조상이 물려준 문화적인 유산을 귀중하게 생각했고 그것을 함께 지키고자 멀리 구미까지 와서 함께 마을을 이루어 함께 귀중한 것을 지키고 있다.
임하댐 수몰지구 주민들이 구미시 해평면 일선리에 집단이주하여 마을을 이루고 살듯이 천국 백성인 우리는 한국 사람이 되어 이 땅에서 잠깐 살고 있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원래 고향은 하늘나라이다. 그런데 이 땅에 파송받아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원래 고향인 하늘나라로 모두 언젠가는 다시 돌아가야 한다. 이 땅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이 영원한 고향이 아님을 인식해야만 실수하지 않고 시간을 허랑방탕하게 사용하지 않고 살 수 있다.
『신국론: 하나님의 도성』(civitas Dei)에서 아우구스티누스(A. Augustinus)는 하나님이 지키시므로 영원하리라고 생각했던 로마가 야만족인 고트족에 의하여 맥없이 무너지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충격에 휩싸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기독교를 변증하고 로마의 위기가 로마 자체의 타락에 기인된 것을 밝히며 로마의 종교와 문화, 정치의 문제점을 낱낱이 지적한다. 야만족의 침입으로 영원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로마제국이 무너졌을 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실망하고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고 교회를 공격할 때 아우구스티누스는 『신국론: 하나님의 도성』에서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면서 동시에 이 땅의 시민임을 말했다.
『신국론: 하나님의 도성』은 총 22권으로 구성되어 있는 책으로 아우구스티누스가 14년이나 걸려서 저술한 역작이다. 처음 1-10권은 기독교에 대한 변증이고, 11-22권은 두 도성에 대한 이야기로 구성된다. 이 책의 유래는 주후 410년 게르만족의 일파인 고트족에 침입으로 로마가 약탈당하자 이교도들은 기독교에 책임을 돌리며 하나님을 모독하였다. 이러한 상황에 처하자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의 집’에 대한 열망으로 기독교를 변증하기 위하여 『신국론: 하나님의 도성』을 저술했다. 이 책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모든 믿는 자들로 구성되는 교회를 ‘하나님의 도성‘으로 표현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책에서 교회를 세상에서 최고의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영역으로 보면서도 동시에 영원한 하나님의 도성과는 다르고 동일시 할 수 없다고 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떠나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세상 속에서 살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서 순례자와 나그네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책에서 시간 안에 있는 지상 나라의 불완전성과 동시에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속하는 지고한 행복을 말하면서 종말론적으로 결론을 내린다. 아우구스티누는 하나님의 도성(civitas dei)과 지상의 도성(civitas terrena)을 구별하면서도 기독교인의 지상적인 삶의 실상을 두 도성의 혼합되어 있는 실재(實在)로 다루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는 일치하는 실체는 아니다.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지만, 세상에 속한 한에서는 늘 부족한 모습대로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모습이다. 바울은 세상에서의 인간의 삶을 장막집으로 말한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고후 5:1)
참으로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히려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고후 5:4)

인간은 누구나 이 땅에서 영원히 살 수 없는 존재이기에 이 땅을 언젠가 떠나가게 된다. 바울은 이 땅에서의 삶을 ‘장막집’(고후 5:1) 또는 ‘장막에 있는 우리’(고후 5:4)란 말로 표현한다. 자신의 삶이 영원하지 못하고 유한하다는 것을 인식할 때 인간은 신 앞에서 누구나 겸손할 수밖에 없다. 인간이 힘있고 건강하고 젊을 때는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인간의 생명도 유한하고 할 수 있는 능력도 유한하다. 즉 어느 누구나 한계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인간이다. 한계치 안에 살 수밖에 없는 인간이기에 각자가 자신의 분수를 알고 그 분수에 맞게 사는 것이 참된 지혜이다.
비가 오면 그 빗물이 모여 흐르고 흘러 하천(河川, stream)을 이루고 빗물이 모인 하천이 여럿 모여 흐르고 흘러 강을 이루게 된다. “강(江)과 하천(河川, stream)이란 용어는 일반적으로 규모에 따라 달리 사용된다. […] 수많은 지류 하천이 모여 작은 강으로, 작은 강들은 합체되면서 상대적으로 큰 규모를 이룬다.” 구미에서 상주시 낙동면으로 가는 길에서 낙동강은 늘 친구가 되어 주었다. 낙동강은 말없이 유유히 흐르고 길가는 나그네의 마음을 늘 붙잡는다. 한참 동안 강물에 내려앉은 구름과 산과 마을을 바라보노라면 온갖 염려가 다 사라진다. 차분해진 마음으로 발길을 돌리면 낙동강에 일렁이는 바람이 길동무가 되어 줄듯이 마중을 한다.
하나님은 무한하시지만, 모든 인간은 유한하다. 낙동강 유역을 순례하면서 늘 생각하는 것은 낙동강 물은 어제나 오늘이나 늘 이렇게 유유히 흘러간다는 것이다. 흘러가는 강물을 보고 있는 인간의 마음은 매일매일 일정치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물은 유유히 흐르고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배위량은 저 흘러가는 낙동강 물을 바라보면서 무엇을 생각했을까? 예나 지금이나 낙동강 물은 유유히 흘러간다. 유유히 흘러가는 낙동강 물을 바라보면서 이 시대 사람들이 무엇을 생각하며 사는 것이 더욱 가치있게 사는 삶일까? 영원하리라고 생각했던 강력한 어느 국가도 언젠가는 소멸되었다. 세상사(世上事)는 생성과 소멸의 역사의 연속이다. 세상에서 영원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배재욱 교수
<영남신학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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