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 믿음으로 한국 땅에 뛰어든 배위량 목사 (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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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위량의 제 2차 순회 전도 여행 (65)

구미에서 상주까지 (13)
낙동강은 영남 사람들에게는 어머니의 강이다. 영남 어느 지역이라도 직간접적인 면에서 볼 때 낙동강의 혜택을 받지 않는 지역은 거의 없을 정도로 영남 사람에게 낙동강의 영향력이 지대하다. 현대처럼 길이 곧고 바르게 만들어지고 다리가 건설되기 전까지는 자연지형을 그대로 이용하여 길이 구불구불하게 만들어지고 강을 건널 때는 나룻배를 이용했다. 큰강인 낙동강을 건너는 데는 강을 헤엄쳐 건널 수도 있었겠지만, 위험하기에 나룻배로 강을 건너다녔다. 동해안 지역을 제외한 영남지역의 전역을 휘둘러 흐르는 낙동강을 건너는 길목에는 나루터가 생겼고 나루터 주위로 마을이 형성되었다. 나루터에서 뱃사공이 강을 건너기를 원하는 행인들을 기다려 나룻배를 저어 강을 건너다녔다.
동국여지승람에 낙동강(洛東江)이란 이름이 처음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3국 시대에는 황산강(黃山江)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다. 낙동강이란 이름의 유래가 몇 가지 있지만, 낙양으로 일컬어진 상주의 동쪽 땅을 흘러가는 강이란 의미로 낙동(洛東)이란 이름이 불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필자가 어린 시절 다녔던 초등학교는 나루터란 이름이 들어간 마을에 있었다. 어린 시절 낙동강의 지류인 회천을 따라 한 10여 리를 걸어서 학교에 가면 학교 건너편 강 언덕에서 강바닥으로 내려와서 나루터에서 나룻배를 기다리면 뱃사공이 배를 몰고와 우리를 맞이하면 우리는 그 나룻배를 타고 학교가 있는 마을로 건너 갔다. 그렇게 나룻배를 6년간이나 타고 학교에 다녔다. 당시에는 물의 양이 많아 나룻배가 다니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그 당시에 하얀 백사장에 흐르던 회천(會川)은 물이 맑고 깨끗하여 은어가 뛰놀던 1급수였다. 그런데 지금은 비가 덜 오는 것이 아닌데도 강에 물이 많이 적어졌다. 회천의 상류지역인 성주에 조성된 인공호수인 성주호에 많은 물을 저장하고 성주읍과 대가야읍에서 생활용수로도 끌어가고 성주군에 조성된 성주산업단지, 고령군에 조성된 개진일반산업단지 등에 필요한 공업용수로 많은 물을 끌어간다. 그 영향으로 회천의 수량이 많이 줄어들었다. 그 영향으로 회천이 흐르는 강바닥을 제외한 강안(江岸)부터 제방까지의 땅은 잡초밭이 되어 온갖 잡초가 다 있어 강이 밀림이 되었다.
<복숭아 나루터>란 뜻을 가진 도진(桃津)은 면사무소가 있는 마을이다. 그 마을에 초등학교가 있었다. 하지만, 농촌 인구의 감소로 초등학교가 분교가 되었다가 지금은 폐교가 되어 한 개의 교사(校舍)와 관사 건물과 그 터 그리고 운동장만 남아 있다. 그 학교뿐만 아니라, 전국에 폐교된 초등학교가 부지기수이다. 그 정도로 인구 감소가 진행되고 있다. 그 영향은 대학교 입학정원이 고등학교 입학 정원보다 더 많은 기현상을 보이고 있다. 그래서 모자라는 학생을 채우기 위해 어떤 학교는 신입생 충원에 사활을 걸고 있고, 외국 유학생으로 입학생을 채우기 위해 고심하고 있다. 인구 감소 문제는 현 사회가 처한 상황을 잘 나타내고 있다. 아무리 좋은 것이지만, 그것을 이어갈 사람이 없으면 그 좋은 일도 연결되지 않는다.
배위량은 선산군 해평면에서 잠을 잔 후 이튿날인 4월 26일 수요일에 영남대로 길을 통하여 상주 낙동에 도착했다. 해평에서 영남대로로 도개면을 통하여 걷다 보면 의성군 단밀면에 도착한다. 그곳에서 상주로 가기 위해서는 낙정(洛井) 나루터에서 나룻배를 타고 낙동으로 건너가서 상주로 가야 한다. 낙동강가에 형성된 낙정마을에 낙동강 나루터 중에서도 큰 나루에 속하는 ‘낙정 나루터’가 있다.
낙정 나루는 영남대로를 따라 걸었던 사람들에게 친숙한 나루터로 큰 나루터가 있었던 낙정나루는 중요한 교통의 요지였다. 낙정으로 모인 물은 낙동강의 넓은 하천유역에서 휘둘러 큰 물굽이를 이루며 남으로 남으로 흘러 내려간다. 영남대로는 의성 단밀면에서 낙동강 건너편인 상주 낙동면으로 이어지고 다시 상주에서 문경(聞慶)으로 이어진다. 문경에서 문경새재(Mungyeong Saejae)를 넘어 충청북도 괴산군으로 이어지는데 문경새재는 높이가 1,017m가 되는 고갯길이다. 문경 새재길은 조선 시대에는 과거 길로 일컬어졌던 길이다. 옛날에는 고속도로도 지방도로도 없었다. 영남대로가 영남지역에서 한양으로 가는 중요한 통로였다. 그래서 배위량도 부산 동래에서 영남대로 위를 걸어 나루배가 있는 낙정 나루터로 왔고 낙정에서 나룻배를 타고 낙동지역으로 건너갔다. 의성군(義城郡) 단밀면(丹密面)과 상주시 낙동면을 이어주는 낙단교가 1986년에 개통되기 전까지는 나룻배가 운행하면서 사람과 짐을 운반했다. 근래까지 낙정 나루터가 유지 된 것을 보면 이 지역 사람들이 전통을 중요시했던 탓도 있겠지만, 이미 경부고속도로가 생기고 지방도로가 많이 생겨 나루터가 있었던 낙정을 거치지 않고 다른 길로 돌아서 차를 타고 다녔다. 조선 시대엔 낙정나루가 중요한 교통을 요지였지만, 교통의 발전 과정에서 그 중요성이 사라져 낙정 나루터 인근 지역이 소외지역으로 전락했고 그 때문에 개발이 늦어졌다. 이런 저런 영향으로 낙정에는 아직 옛 정취가 많이 남아 있다.
낙정나루 인근 언덕 위에 ‘물을 보는 누각’이란 뜻을 간직하고 있는 ‘관수루’가 서 있다. 관수루에서 언덕 아래로 흘러가는 낙동강을 바라보는 것도 여행의 묘미를 더해 준다.
2016년 7월 11일(월) 필자는 대구에서 새벽에 구미역으로 가서 구미역에서 택시를 타고 구미 산호대교로 갔고 산호대교에서 혼자 낙동을 향해 걸었다. 그때 구미에서 예천 용궁까지 3박 4일 일정으로 배위량길을 순례를 했다. 그날 저녁에 낙동면사무소 인근에서 그 당시 영남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에 재학중이었던 김완영 전도사(지금 청도 지전교회 담임목사)와 낙동 버스정류장 인근에서 만나 함께 돼지국밥을 한 그릇씩 먹었다. 혼자 순례를 하는 경우는 새벽에 집을 나서서 순례 출발지까지 기차나 버스를 타고 가서 목적지까지 걷고 집으로 와서 잠을 잔 후 다시 다음 순례의 출발지로 가서 목적지까지 걷는 일정을 잡는다. 집으로 오지 못하는 경우는 멀리 갈 수 없는 형편이라, 잠을 잘 수 있는 여관이 있는 곳까지 걷고 그곳에서 혼자 잠을 자고 이튿날 걷는 일정으로 했다. 혹 동아리 학생들이 함께 할 때는 순례 목적지에 소재한 교회의 교육관을 빌려 잠을 잔 후 이튿날 일정을 소화했다. 이때는 3박 4일 동안 상주시 낙동면에 소재한 성신교회(담임: 백동수목사)에서 1박, 상주시에 소재한 상주교회(담임: 곽희주목사)에서 일박 그리고 예천군 용궁면에 소재한 용궁풍성한교회(담임: 김한식목사)에서 일박을 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순례 마지막 날인 7월 14일(목)에 영남신학대학교 배위량길 평화 순례단 동아리 학생들이 대구에서 와서 합류하기로 했다. 용궁면에 있는 회룡포를 돌아 보고 대구로 돌아오기로 계획을 세웠다. 신학대학교 학생들은 지금도 학교 일, 교회 일 등으로 바쁘다. 당시에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다들 바빠서 마음은 원이로되 시간이 허락지 않아 마지막 날만 참석하기로 했다. 몇 명은 학교에서 만나 같이 회룡포로 바로 승용차를 타고 왔고, 가차를 타고 용궁역으로 오기로 한 학생들도 있었다. 김완영 전도사만 3박 4일 일정으로 참석하기로 했다. 그때 김완영 전도사는 학교 기숙사에 기거했는데, 한 학기 동안 3박 4일 일정의 순례를 위해 아침저녁으로 조깅을 하면서 순례를 준비했다.

배재욱 교수
<영남신학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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