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찬익 장로는 배운 것 없고 예수 믿기 전에는 전국을 돌아다니는 한량으로 노름하고 술을 마시며 미신에 젖어 살았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게일 선교사를 만나 예수를 믿은 벙어리였던 사람이 말을 하게 될 뿐 아니라 예수를 증거하는 데 그를 따를 사람이 없을 정도였고 그의 기독교인으로서 실천적 삶이 성인에 미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가난하고 자기처럼 무식한 사람들, 병든 사람들을 영적으로 건져 내는 데 생명을 다했다.
고찬익 장로는 초대교회의 빌립과 같았다. 평신도로서 유명인이나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찾아가서 전도하고 도와주었다. 그의 열정적 전도가 연동교회를 부흥케 했다. 그의 설교는 많은 사람들을 회개하게 했으며 훌륭한 일꾼이 되게 했다. 그는 갖바치 출신이나 열심히 성경을 읽었기 때문에 성경 컴퓨터였다. 평양신학교를 다니던 중 세상을 떠났다. 그가 만일 신학교를 졸업하고 게일 목사의 보고서에 나타난 대로 연동교회의 봉사목사가 되었다면 서울에서 한국인 최초 목사가 되었을 것이며 서울에서 평양의 성령운동을 일으켰을 것이다.
김인서 목사가 고찬익 장로 별세 여러 해 만에 연동교회를 방문했다. 그런데 천 명이 넘게 예배에 참석하던 교인 수가 절반이나 감소했다. 이것은 한 사람의 충성된 장로가 교회를 부흥케 한다는 것을 증명한다. 장로 한 사람이 교회 부흥에 크게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다.
고찬익 장로는 한국교회 역사에서 모범적 장로 상을 세웠다. 훌륭한 장로 한 사람이 교회에 미치는 영향력을 확실하게 증명했다. 그는 게일 목사와 최선의 협력으로 전도했으며 장로로서 목회자와 합력했던 모범적 사례다. 그래서 게일 목사는 연동교회 목회자로 훌륭한 장로 한 사람을 두기 위해서 서울의 양반들과 갈등을 가지면서도 고찬익 장로를 선출했고 장로로 장립했다. 고찬익 장로가 별세했을 때 그렇게 슬퍼한 것은 가장 가까운 친구요 최선의 협력자를 잃었기 때문이었다.
한 사람의 장로가 세상을 떠났을 때 목회자가 이렇게 슬퍼하고 애석하여야 한다. 그 증거가 가장 협력자였다는 것이다. 게일 목사와 고찬익 장로는 하나님이 맺어 주신 목사와 장로였다.
김인서 목사는 고찬익 장로를 위한 시를 남겼다.
빈자의 벗가신 뒤에
앉은 방이는 누가 업고
주의 충복 떠나시니
중생은 누가 건지오.
옛 성도는 올라가고
새 사도는 오지 않음이여,
불붙던 우리 교회
어름같이 차가움이여,
가신 성복 충성하였거늘
우리 후인 불초하여
차고 넘든 옛 성당에
반 넘어 공석인 걸
성 밖에 버려진 후생
가신 선생 추억하노니
성당 뜰에 눈물짓고
산모퉁이에서 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