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보포럼] 전쟁때, 금괴 수송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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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때 가장 힘든 일 중에 하나가 한국은행이 보관하고 있는 금괴와 국립박물과에 소장하고 있는 국보급 문화재를 어떻게 보관, 운반, 피난시키느냐 하는 점이다. 금괴는 무겁기도 하고 남의 눈에 띄면 강탈 당할수 있기 때문에 더욱 비밀이 유지되어야 한다.
전쟁 3일째인 6월 27일 한국은행의 구용서(具鎔書) 총재는 서울에 적군이 들어올 때가 됐으니 금괴를 빨리 옮기라는 전화를 받았다. 안 그래도 가장 걱정하고 있던 차에 전화를 받고 어떻게 해야 좋겠느냐고 되물었다. ‘국방장관’을 만나 상의하라는 뜻을 전하고 끊었다. 전화를 건 사람은 국방부 군수물자 이송책임을 맡고 있는 국방부 3국장 김일환(金一煥) 육군대령이었다. 당시 한국은행에는 금괴 1070kg, 은괴 2513kg등 3.5톤을 보관하고 있었다. 구 총재는 즉시 신성모 국방장관을 찾아갔다. 국방장관은 군 트럭을 내줄테니 진해 해군통제부로 즉시 옮기라는 것이었다. 대한민국 사상 초유의 금괴 수송작전이 시작된 것이다.

다음날 트럭 2대에 금괴 89상자를 싣고 위에는 위장용으로 나뭇가지를 덮은 군용트럭이 오후 3시에 헌병의 엄호를 받으며 서울을 빠져 나갔다. 트럭은 경기도 시흥에 있는 보병학교를 거쳐 대전에 도착한 것은 다음날 12시였다. 서울을 빠져나간 금괴는 바로 한국은행 대전지부 금고에 입고됐다가 다음날(29일) 진해 해군통제부로 옮겨졌다. 해군에서는 해군통제부의 경리부장인 김익성 해군대령 책임하에 인수와 보관됐다. 그리고 29일 부산으로 옮겨졌고 미국 정부의 권고에 따라 8월 1일 미군 상선에 실려 샌프란시스코로 보내져 ‘뉴욕 연방준비은행’(FRB)에 맡겨졌다. 금괴 비밀 수송작전은 이렇게 끝나게 되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뒤 1955년 우리나라가 국제금융통화기금(IMF)과 국제부흥개발은행(IBRD)에 가입할 때 지분 출자금으로 사용되면서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당시 한국은행의 외환보유고는 고작 3,000만 달러였다. 세계금융위원회에 따르면 2016년도 기준(현재는 비밀) 한국은행이 보유하고 있는 금의 양은 104톤이다. 그러나 한국은행 금고에는 없다. 항상 전쟁상황을 대비해 정부가 금괴를 영국 런던의 영란은행으로 옮겼기 때문이다.(국방일보2016.6)
그러나 한국은행에는 미처 옮기지 못한 순금 260kg와 은 15,970kg이 남아있었는데 이것은 6월 28일 북한군 손에 넘어갔다. 매우 아쉬운 대목이다.

한국은행은 1909년 11월에 설립된 구 한국은행이 1911년 8월 1일 조선은행으로 개편됐다가 정부 수립 이후 새로 제정된 한국은행법에 따라 1950년 6월 12일 현재의 한국은행으로 재창립되었다. 6.25전쟁 발발 13일 전이다. 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한국에서 지폐를 발행하지 못하고 일제시대에 조선은행에서 발행한 지폐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전쟁이 터지자 월요일부터 기업과 시민들이 돈을 찾으러 은행으로 몰려들었다. 26일과 27일 이틀 동안에 무려 76억8천만 원을 찾아갔다.(조선일보 1998.8)
정부가 남쪽으로 피난하면서 한국은행도 부산으로 옮겼다. 그러나 조폐공사가 북한군의 손에 넘어갔기 때문에 전쟁 비용을 마련하기 위한 돈을 찍어낼 수 없었다. 한국은행은 동경지국을 통해 처음으로 한국화폐를 인쇄하여 7월 13일 군용기 편으로 1천원권 60억원이 김해공항을 통해 한국으로 들어왔다. 다음날도 1천원권 92억원, 1백원권 2억3천만 원이 들어왔다. 그러나 북한군이 한국은행에서 약탈해 간 조선은행권을 남발하고 북한 화폐도 강제 유통시키는 바람에 경제는 엉망이었다. 경제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1950년 9월부터 53년 1월까지 기존 조선은행권을 한국은행권으로 바꿔주는 제1차 화폐개혁이 단행됐다. 그리고 1953년 2월 15일 대통령령으로 2차 화폐개혁을 단행했다. 이때는 조선은행권 100원 짜리를 한국은행 신권 1환()으로(100대 1의 비율) 바꿔주었다. 한편 1962년 6월 10일 혁명정부에서 3차 화폐개혁을 단행했다. 지하자금을 색출해서 경제개발에 활용하려는 목적이었다. 이때 화폐 단위가 10대 1로 축소했고, ‘’에서 다시 ‘원’으로 바꿨다. 영국에서 인쇄하여 극비리에 추진했지만 목적달성에는 실패한 것으로 알려졌다.

배영복 장로<연동교회>
• 한국예비역기독군인연합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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