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돌아 본 삶의 현장] 대전대학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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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린애 셋을 둔 만학의 학생으로 대전대학 수·물과 3학년으로 편입하게 된 것은 기전학교 교장으로 계셨던 한미성 교수의 특별한 권고 때문이었다. 그분은 정말 나를 아끼고 있었다. 입학금과 첫 학기 등록금을 제공해 주겠다고 제안했으며 영문과 과장인 자기의 조교로 있어 달라고 부탁했다. 내가 가족을 부양하기 힘들 것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대학 역사상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어떻게 수학과 학생이 영문과 과장의 조교가 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나 나는 수락하였다. 학생 출결 검사를 하고, 숙제 검사, 한 교수에게 온 편지의 답장 쓰기 등을 했다. 그밖에도 학생들의 영어 회화를 돕기 위해 대전 계족산 아래 장동(현 대덕구)에 있는 미군 기지촌의 사병들을 밤에 초청하여 그들에게 쿠키를 준비해서 제공하고 영문과 학생들과 묶어주는 일도 했다. 그런데 내가 이 대학의 수·물과에 입학하여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놀란 것은 이 대학은 매일 아침 8시에 20분씩 채플이 있어 학생들은 거기에 출석해야 했다. 새벽기도를 매일 드리는 기분이었다. 거기다 모든 학생이 성서 과목을 필수로 이수해야 했다. 나는 편입했기 때문에 졸업에 필요한 필수과목인 성서 과목을 2년에 압축하여 수강했다. 따라서 신·구약 개론, 선지론, 바울서신, 일반서신, 성서 지혜문학, 성서 계시문학, 교회사 등을 나는 다 필수과목으로 18학점을 이수해야 했다. 이 대학은 교회 생활의 연장이요 신학교 학생이 된 느낌을 주는 곳이었다. 

나는 기전학교 교사로 있던 61년 여름 문교부 해외 유학 시험을 통과하였다. 그래서 선교부에서 시행한 해외 유학 시험에 도전하게 되었다. 62년 8월에 유학을 떠날 시험은 61년 12월 광주에서 있었다. 그때 나는 예수병원 의사로 있는 어떤 장로와 함께 합숙했다. 한방에서 자는데, 그분은 자기 전에 기도하고 아침에 눈을 떠보니 또 기도하고 있었다. 남이 보는 데서 그런 기도를 드리는 것에 익숙해 있지 않던 나는 그냥 누워 있었다. 그러나 자신이 꼴사납게 느껴지고 불안하였다. 그렇지만 끝내 일어나지 못하고 이불 속에서 속으로 기도하였다. 

“하나님 제가 여기까지 시험 보러 왔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안 되면 또 다른 길을 열어 주십시오. 지금까지 저를 인도하시듯 앞으로도 길을 열어 주십시오. 제가 따르겠습니다. 하나님, 그러나 기왕이면 오늘 시험을 잘 보게 해주십시오.”라는 기도였다. 시험 결과는 불합격이었다. 그때 한 교장으로부터 선교부의 그해 방침은 기독교 지도자를 양성하는 대전대학 교수들을 우선으로 뽑았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한순간 매우 분개했다. 응시 자격에 대학 졸업자라는 말은 없었다. 그러나 나는 내 욕심에 사로잡혀 앞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어떻게 선교부에서 장학금을 주어 미국에서 학부부터 박사까지 나를 키울 생각을 하겠는가? 나에게 결과를 알려준 분은 한 교장이었는데 그때 하얗게 질린 나를 보며 측은한 표정으로 위로해 주었던 그분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한 교수는 기전을 떠나서 대전대학으로 옮기면서도 그런 나를 잊지 않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나를 이 학교로 초청했으며 나는 도저히 혼자서는 결단할 수 없는 결단을 내리고 이 대학에 오게 된 것이다. 더 크게 생각해 보면 하나님은 나를 더 이 학교를 통해 기독교인으로 신앙 훈련을 시키고 싶으셨던 거라고 생각된다. 나는 입학한 한 학기 동안은 한 교수의 조교로 있었지만 둘째 학기 때부터는 성적 장학금도 받았으며 시내에 개인 교사 자리도 구해 열심히 뛰게 되었다. 그러나 내 신앙의 훈련은 대학생 선경 연구회로 계속되었다. 

당시 한 교수는 대전지구 성경연구회 UBF(University Bible Fellowship)를 창설하고 대학생 성경 연구모임을 시작하고 있었다. 이 모임은 내게 큰 도전이었다.

오승재 장로 

•소설가

•한남대학교 명예교수

•오정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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