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보포럼] 중공군을 수원에서 멈추게 하신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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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유엔군이 압록강까지 진격했을 때, 중공군이 참전하여 인해전술을 쓰는 바람에 국군과 유엔군은 다시 1951년 1월 4일 서울을 내주고 평택까지 후퇴하는 사태로 발전됐다. 중공군은 서울을 점령하고 1월 10일 수원까지 내려왔으나 갑자기 남하를 정지하고 휴식에 들어갔다. 국군과 유엔군이 9.28 서울 수복 이후 3개월 만에 벌어진 놀라운 변화다.
왜 이런 상황이 전개됐을까?

공산군은 예상치 못했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고 북진을 계속하자 순식간에 38선을 빼앗기고 10월 20일에는 평양까지 내주고 압록강으로 멀리 쫓겨 갔다. 김일성도 평안북도 국경도시 강계(江界)로 피신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중공군이 대거 참전하여 인해전술로 밀고 내려왔다. 맥아더 사령부는 중공군의 참전이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가 날벼락을 맞은 셈이 되었다. 맥아더는 중공군의 참전 소식을 듣고 처음에는 믿으려 하지 않다가 사실로 밝혀지자 국군과 유엔군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 후방 깊숙이 철수하라고 명을 내렸다. 동부전선에서는 바닷길로 부산으로, 서부전선에서는 서울 남쪽으로 철수시켰다. 1950년 12월 말, 소위 「1·4후퇴」를 감행하게된 것이다.
너무 갑자기 이루어진 상황이었으므로 한국 정부도 속수무책이었다. 150만 명의 서울 시민과 북에서 밀려오는 피난민의 대책 없이 무조건 피난길을 떠났다. 꽁꽁 얼어붙은 한강을 걸어서 건너갔고 기차 지붕 위에도 백여 명씩 올라탔다. 영하 20도를 오르내리는 혹한기에 시민의 80%가 떠났으니 서울은 유령의 도시로 변했다.
이때 미국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하자 맥아더는 북폭(만주)을 주장했고 원자탄 사용 권한도 위임해 달라고 요구했다. 미 합참에서는 제3차 대전을 예방하기 위해 핵무기 사용을 반대했고 한국 철수를 신중하게 검토하고 있었다. 또 워커 장군이 교통사고로 순직하자 새로 부임한 미8군사령관 리지웨이 장군(12월 26일 부임)에게는 철군을 준비하라고 명령까지 내린 상태였다. 1950년 12월은 한국의 운명을 바꿀 큰 변화가 생기고 있었다.

①중공군의 입장에서 보면 조금만 더 밀고 내려가면 미군이 한국을 포기하고 철수할 계획이었는데(그 사실은 모르고 있었음) 왜 갑자기 정지했는가? 중공군 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는 미군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승리에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 피곤한 장병들을 데리고 전투를 계속하기보다는 2주 동안 쉬면서 휴식도 하고 보급품도 보충하며 새로운 힘을 얻어 일시에 공격하여 미군을 부산까지 밀고 내려갈 생각이었다.

②리지웨이 장군의 입장에서 보면 중공군과 싸워보지도 못하고 부임하자마자 철수 명령을 받게 되어 마음이 편치 않았다. 장군은 철수할 때 하더라도 중공군의 전투 능력과 전의(戰意)가 어느 정도인지 살피기 위해 적과의 접촉을 시도하고 여단급 전투단을 편성하여 오산에서 수원까지 위력수색을 시켰다. 그런데 수색대가 수원까지 가는 동안 중공군이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게 생각한 8군사령관 리지웨이 장군은 「아- 여기까지가 중공군의 능력」이구나라고 판단하고 즉시 반격에 들어갈 준비를 했다. 1월 25일 반격을 시작한 국군과 유엔군은 3월 15일 서울을 재탈환하고 단숨에 38선까지 밀고 올라갔다. 중공군이 피곤에 지쳐 휴식하고 있은 사이 미군의 반격을 받은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또 한 번 하나님의 계획과 역사하심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하늘에서 봤을 때, 이 민족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적그리스도인 중공군이 미군을 쫓아내고 한반도를 적화통일하게 내버려두지 않으신 것이다. 그래서 펑더화이 마음에 ‘휴식’이라는 생각을 떠오르게 하시고, 미군에게 반격의 기회를 주신 것이다. 즉 전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기막히게 연출하신 것이다. 침략자의 발을 멈추게 하고, 반격의 기회를 주심으로 대한민국을 살리신 것이다. 영안(靈眼)으로 봤을 때 하나님의 계획과 역사하심은 참으로 놀랍고 감사할 뿐이다.

배영복 장로<연동교회>
• 한국예비역기독군인연합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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