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믿음으로 한국 땅에 뛰어든 배위량 목사 (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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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위량의 제2차 순회 전도 여행 (74)

구미에서 상주까지 (22)

그러면 이제 배위량이 낙동에서 쓴 일기에 나오는 ‘악동’(‘Aak Tong’)은 ‘낙동’(‘Nak Tong’)의 오타일 것이고, ‘김산’(‘Kim San’)은 경상북도 김천시의 옛 지명이다. 나중에 “조선시대 김산군(金山郡)의 일부인 김천면·군내면·미곡면 일대”가 김천시로 발전되었고 김산군은 금릉군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1995년 “대대적인 전국 행정구역개편으로 농촌지역이었던 금릉군과 하나의 도농통합시를 이루어 김천시가 되었다.” 그런데 낙동에서 구미시 도계면까지 내려가서 다시 선산을 거쳐 김천을 가면 100여리 정도 된다. 그리고 낙동에서 낙동강을 따라 내려가 선산까지 가서 선산에서 김천까지 걸어가도 100여리 된다. 이렇게 두 사선면을 이어 볼 경우 그 다른 한 면을 이으면 삼각형의 도형이 되는데, 낙동에서 선산을 거치지 않고 바로 김천까지 직선으로 이어주는 삼각형의 한 면을 이어주는 길을 가정한다면 그 길은 약 80여리 된다. 그리고 선산에서 김천까지의 직선거리는 약 60여리 된다.
그러면 “김천(Kim San)은 이곳에서 80리나 떨어진 아래쪽에 있다고 들었는데, 그곳은 성주 쪽으로 흐르는 강의 서쪽지역에 속한 곳이다.”라고 한 언급에 나타나는 ‘이곳’은 선산인가 아니면 낙동인가? 이 문장 앞에 “우리는 선산 읍내를 지나 왼쪽 방행으로 갔고, 강을 건넜다”란 문장이 나오고 한 문장을 건너뛰어 나오는 문장이 “김천(Kim San)은 이곳에서 80리나 떨어진 아래쪽에 있다고 들었는데, 그곳은 성주 쪽으로 흐르는 강의 서쪽 지역에 속한 곳이다.”란 문장이다. 이런 문장 구조로 보아 뒷 문장에 등장하는 ‘그곳’은 김산, 즉 김천을 의미한다. 그런데 앞의 문장에 등장하는 ‘이곳’은 ‘낙동’인지 아니며 ‘선산’인지 일기의 문장에서는 예측키 어렵다. 우선 배위량이 4월 26일 일기를 상주 낙동에서 쓰기에 ‘낙동’에서 일기를 쓰면서 자신이 있는 곳을 ‘이곳’으로 명명했다고 보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다. 그런데 만약 배위량이 1893년 4월 26일 ‘선산’을 방문했다면 ‘이곳’을 ‘선산’으로 보고 일기를 작성했다고 보는 것도 무방할 것이다.
그런데, 지난번에 필자가 1893년 4월 26일에 해평에서 출발하여 상주시 낙동면에 소재한 낙동 마을까지 가는 동안에도 그리고 낙동에 도착한 후에라도 배위량이 선산을 방문하지 않았을 개연성이 더 크다는 것을 논증했다. 그것은 시간상으로 그리고 지리적인 여건상으로 배위량이 1893년 4월 26일에 선산을 방문하는 것이 도저히 불가능하다. 이런 이유로 필자는 배위량이 기록한 일기 중에 나오는 “서울로 가는 길은 ‘이곳에서’ 낙동의 서쪽 지역을 가로지르고 있었다”란 문장과 “김천(Kim San)은 ‘이곳에서’ 80리나 떨어진 아래쪽에 있다고 들었는데, 서울로 가는 길은 이곳에서 낙동의 서쪽 지역을 가로지르고 있었다.”란 문장을 집중적으로 파고 들었다. 그런데 “이곳에서 낙동의 서쪽 지역을 가로지르고 있었다.”란 문장과 “그곳은 성주 쪽으로 흐르는 강의 서쪽 지역에 속한 곳이다”란 문장을 세밀히 살피면 ‘김천(Kim San)’, ‘이곳에서’ 그리고 ‘강’이란 세 지역에 눈길이 간다. 위의 세 지역은 배위량이 임의로 구분한 3개의 구분된 지역이다. 문장 구조로 보아 ‘이곳에서’가 가장 동쪽에 있는 지역이고 ‘낙동강’이 그 세 지역 중에서 중간에 있고 ‘강의 서쪽 지역’과 ‘서울[한성]로 가는 길’이 가장 서쪽에 위치하는 지역으로 이루어진 평면 구조가 된다.
이런 유추를 통해 판단할 때 만약 배위량이 이 일기의 문장을 직접 썼다고 가정할 때 그리고 그런 개연성이 100% 맞다 가정할 수 있다면, 필자는 이미 리차드 베어드가 편집하여 출판한 배위량의 일기인 William M. Baird of Korea : A Profile에 없는 부분은 1946년 8월 15일 이후에 첨가했을 것으로 보는 글을 몇 주 전의 글에 논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위에 언급한 일기의 부분이 배위량에 의하여 기록되었을 개연성이 100% 맞다면 배위량은 해평에서 낙동을 향해 가는 도중, 다시 그들이 걷고 있었던 지역인 그곳에서 김천까지 거리가 80여리 되는 노중(路中)이었을 것이고 배위량은 그 지역을 여행하는 중에 마부들로부터 선산읍과 김산[김천]이 낙동강 서쪽에 위치한 지역인데, 선산은 바로 강 건너 서쪽에 위치한 지역이고 김산[김천]은 여기(배위량이 당시 걷고 있는 지점: 아마도 구미시 도개면 어느 곳)에서 80리 되는 곳에 있는 지역이다라는 이야기를 들으며, 자신이 가지고 온 조선 지도를 보면서 그 사실을 수긍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낙동에 도착해서 길에서 들었던 그 사실을 기억하여 그것을 적었을 것이다.
그런데 사정이 이렇다고 가정해도 배위량이 해평에서 잠을 잔 후 그 이튿날 낙동으로 가는 길의 도중에 선산읍에 들렀다가 그 후 다시 낙동으로 갔거나, 낙동에 도착한 후 낙동에서 선산읍으로 갔다가 선산읍에서 다시 낙동으로 돌아와서 그날 일기를 쓰면서 선산을 방문한 사실을 일기에 썼을 개연성은 당시의 지리적인 여건상으로나, 시간상으로 전혀 개연성이 없다는 사실을 앞에서 논증했다.
필자가 이렇게 주장함에도 불구하고 아직 질문거리가 남아 있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배위량의 일기를 옮겨 적으면서 배위량의 일기 원본에 더하여 첨가를 했을까? 원본에 없는 부분을 옮겨 적을 때 한국의 지리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 옮겨 적지는 않았다고 판단된다. 그렇다면 배위량의 가족 중에 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배위량의 첫 번째 부인 안애리(에니 베어드, Annie A. Baird)가 암으로 1916년에 사망한 후 배위량은 로즈 페트롤프(R. M. Pettrolf)와 재혼을 했다. 리차드 베어드(Richard H. Baird)가 배위량의 본래 일기를 기본으로 하여 배위량의 선교 보고서와 자신의 형의 편지를 참조하여 배위량의 William M. Baird of Korea : A Profile을 편집할 때 이상규가 번역하여『숭실의 설립자. Dairy of William M. Baird 1892.5.18.-1895.4.27. 윌리엄베어드 선교일기』라는 제목으로 책을 출판했던 손으로 옮겨 적은 배위량의 일기장[=<일기 2차본>]에 나오는 많은 부분을 누락했다. 그것은 그가 <일기 2차본>의 존재를 몰랐다고 보는 것이 맞다고 본다.

※서울[한성] : 서울[한성]은 당시 지명인 한성을 서울로 표기한다는 데서 배위량의 아들 리차드 베어드(Richard H. Baird)가 편집한 Richard H. Baird, William M. Baird of Korea : A Profile (NP: N.P.)에 없는 부분은 해방된 뒤인 1946년 8월 15일 이후에 배위량의 일기를 성명 미상의 한 사람이 다시 손으로 옮겨 적으면서 오탈자를 수정하고 설명이 필요하거나 미비한 부분에 대한 설명을 첨가하면서 첨가한 부분임을 앞에서 논증했다. 그것은 한성이란 지명을 한국 민족이 수도를 일반명사인 서울로 불렀는데, 한성을 1946년 8월 15일부터 서울을 한성의 고유명사로 부르게 되었기 때문이다.

배재욱 교수
<영남신학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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