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위량의 제2차 순회 전도 여행 (75)
구미에서 상주까지 (23)
필자가 그렇게 유추하는 것은 <일기 2차본>의 생성자가 배위량의 <원본 일기>를 손으로 옮겨 적으면서 배위량의 원본 일기를 그대로 옮겨 적기만 한 것이 아니라, 손으로 옮겨 적고 정리하면서 수정하기도 하고 설명이 필요한 부분과 첨가해야 할 부분에 대하여 설명도 하고 여백에 첨가도 했다. 그런데 리차드 베어드(Richard H. Baird)가 편집한 배위량의 일기인 <일기 1차본>인 William M. Baird of Korea : A Profile에는 그런 부분이 고려되지 않고 나오지 않는다. 만약 사실이 그렇다면 배위량의 아들인 리차드 베어드(Richard H. Baird)와 그의 형제들은 William M. Baird of Korea : A Profile을 출판할 당시에 <일기 2차본>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것은 리차드 베어드가 배위량의 선교 일기가 주축이 된 William M. Baird of Korea : A Profile을 출판할 때에 그의 형재들이 자신들의 아버지인 배위량과 주고받은 편지 그리고 배위량과 관련된 추억들을 리차드 베어드(Richard H. Baird)에게 전해 주어 William M. Baird of Korea : A Profile에 반영하도록 했다. 그의 형제들이 배위량의 원본 일기를 옮겨 적으며 문법적으로 다소 수정을 가하고 오탈자를 수정하고 설명할 부분에 첨가한 글이 있어 여러모로 원본 일기와 다른 배위량의 <일기 2차본>을 리처드 베어드가 반영하지 않았던 이유를 설명하기 어렵다.
뿐만 아니라, <일기 1차본>에는 나오지만, <일기 2차본>에는 나오지 않는 부분도 있다. 가령 1893년 4월 20일 밀양 유천에서 잠을 잔 후 21일에는 청도에서 잠을 잤는데, 그때 청도에서 잠을 잔 마을 이름이 <일기 1차본>에는 나오지만 <일기 2차본>에는 나오지 않는다. 그것을 보면 아래와 같다. 그 내용은 4월 22일의 일기인데, 배위량이 청도에서 어디서 잠을 자고 대구에서 어떻게 생활했는지 하는 내용인데 <일기 2차본>에는 없는 내용이다.
<일기 1차본>
– 4월 22일 토요일 정오, 대구
대구에 방금 도착했는데, 지금은 오후 한시경이다. 어제 오후에는 안새부리(Ansaipyuri)라는 작은 마을에서 예정보다 일찍 쉬었다. 2~3시간은 더 갔어야 했는데 그러려면 높은 산을 하나 넘어야 했다. 그런데 문제는 마부들이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곳에서 쉬는 것 외에 우리로서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우리는 사람들이 책을 구입하기를 원할 때 길을 잠시 멈추었지만, 그런 경우를 제외하고는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 여행을 계속했다. 설교를 자주할 수는 없었지만, 많은 책자들을 나누어 주었다. 점심 전에 대구에 도착하기 위해 우리는 일찍 길을 나섰다. 우리는 제법 높은 팔조령을 넘어야 했다. 산을 내려오면서 우리는 아주 길고 좁은 골짜기로 들어섰는데, 이 골짜기가 점점 넓어지면서 대구지역의 분지로 연결되었다. 장작을 실은 우마와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을 보면서, 우리가 큰 도시로 진입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영(yung, 일년에 한 번 열리는 대규모 시장)에 온 상인들로 인해 도시 곳곳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도시를 둘러보기 위해 나갔다. 공식기록에 따르면 이 도시에는 3,700여 가구가 살고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세배쯤 되는 약 10,000가구 정도가 된다고 말한다. 만약 그렇다면 인구는 한 50,000명 정도 될 것이다. 내 생각에는 통영보다 크지 않은 것 같은데, 어떤 이들은 대구가 더 크다고 한다. 또 다른 이들은 통영, 마산, 진주, 크기가 엇비슷하다고 한다.
<일기 2차본>
– 4월 22일, 토요일 정오, 대구
달력 몇 부를 분배했다. 멋있는 점은 광택의 비석(10x3x1 1/2ft)이 우리 가까이에 서 있는데, 거기에는 우물이 150년 전에 만들어 졌고, 주위에는 2,120계단이 있다고 적혀 있었다.
* 이상이 4월 22일자 윌리엄 베어드 일기의 전문이다. 그러나 윌리엄 베어드의 아들 리처드 베어드가 편집한 William M. Baird of Korea : A Profile(1968),32쪽에는 아래와 같은 동일자의 다른 기록이 있어 아래에 전재한다.
배위량은 1893년 4월 22일에 대구에 도착하여 4월 24일에 정오가 되어서 동명으로 출발하면서 칠곡(이 칠곡은 현재 칠곡군청 소재지인 왜관이 아니라, 옛 칠곡읍[현 대구의 북구에 속하는 칠곡]을 거쳐 동명에 도착했다.
필자는 배위량에 관한 글을 쓰면서 배위량이 해평에서 쓴 일기를 중심으로 글을 쓰는 동안 이상규가 번역한 『숭실의 설립자. Dairy of William M. Baird 1892.5.18.-1895.4.27. 윌리엄 베어드 선교일기』를 중심으로 글을 썻다. 그 때까지는 손으로 쓴 배위량의 일기가 더 원본일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 손으로 쓴 일기를 번역한 것이 더 권위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글을 썼다. 그런데 동명에서 선산군 해평면[현 구미시 해평면]에 도착하면서 시공을 뛰어넘는 글을 쓰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으면서도 그것에 대한 도전을 받지 못하고 <일기 1차본>과 <일기 2차본>의 다름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과연 배위량이 동명에서 해평으로 가는 길에 칠곡[현: 왜관]을 들린 후 성주를 방문하고 왔을까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 표현이 번역자의 실수이고 『숭실의 설립자. Dairy of William M. Baird 1892.5.18.-1895.4.27. 윌리엄 베어드 선교일기』를 편집한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 박물관>의 실수임을 밝혔다.(「한국장로신문」 1719호, 1720호 참조) 그렇지만 필자는 이때까지는 배위량 일기의 다른 두 본문이 “아 이렇게 많이 다른 부분도 있구나”라는 정도만 인지했다. 그런데, 배위량이 쓴 4월 26일에 상주시 낙동면에서 쓴 일기를 바탕으로 구미에서 상주까지 배위량 길을 걸은 경험을 가지고 글을 쓰는 가운데, 이상규가 번역한 『숭실의 설립자. Dairy of William M. Baird 1892.5.18.-1895.4.27. 윌리엄 베어드 선교일기』를 바탕이 된 손으로 쓴 일기는 원본이 아니라, 한국이 해방된 다음해인 1946년 8월 15일 이후에 배위량의 원본 일기를 보고 베껴 쓰면서 그것에 수정을 가하고 내용을 첨부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한국장로신문」 1740호 참조)
배재욱 교수
<영남신학대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