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NHK방송에까지 한국의 이름난 환락가로 소개된 거리가 있다. 방배동 중앙로 카페 골목이다. 1989년경 음란과 퇴폐 향락과 술 취함과 폭력이 지배하는 거리였다. 술집들이 즐비했고 5~600여 명의 삐끼들이 호객을 했고 범죄가 빈발했다. 아타족 벌타족들의 주 무대이기도 했다. 당시 그곳에 살던 동료 집에 강도가 들었고 술집이 집 앞까지 다가왔다. 그래서 이사 가려고 하다가 초대 교인들은 세상을 뒤집었는데 죄악에 밀려서 이사가다니! 세사람이 의기투합했다. 당시 지검장이였던 전용태, 전경련 정정섭 그리고 나 3인이 모여 기도하기 시작했다. 모임의 인원이 20여명으로 늘어나게 됐다. 그래서 지역 13개 교회 목사님을 초청했다. 이 지역에 교회가 있는 것은 소돔고모라 같은 이 거리를 건전한 거리로 바꾸라는 소명이 있음을 설명했다. 교단과 교파를 초월하여 모였다. 주변이 너무나 오염된 유흥가여서 목사님들도 고민하고 있던 차였다. 새벽기도를 하고 나오면 삐끼들이 다가와 “싱싱하고 물 좋은 게 있다.”며 유혹까지 했다. 술집은 물론 각종 범죄가 발생하고 이발소 안마시술소까지도 모두가 퇴폐업소였다.
목사님들이 적극적으로 호응해 주셨다. 이름을 우리 동네 기도회로 정했다. 청년들도 많이 동참했다. 매주 전도용 회보를 만들어 지역 업소와 주민들에게 배포하고 50여 개의 빗자루를 마련, 매주말 새벽마다 모여 청소를 했다. 모일 때마다 내가 개사한 주제 찬송 “황무지가 장미꽃 같이”를 힘차게 불렀다.
하나님이 성도들에게 정화하라 했으니 지역교회 모두 합쳐서 거룩한 길 만드세.
우리 동네 새로운 동네 매일매일 새롭다. 카페 골목 변화되어서 문화거리 되었네.
그리고 기도를 하고 구호를 크게 외쳤다. 또 지역 교회들이 매주 수요 예배를 돌아가면서 강단을 교류하며 집회를 했다. 새벽 거리 청소, 밤거리 노방전도, 노변 문화제, 음악회 등도 했다. 카페 골목이 변하기 시작했다. 하나둘씩 술집들이 문을 닫게 되었다. 닫았다 하면 술집이고 아귀찜 가게나 의류점 편의점 등으로 바뀌었다. 매주 모일 때마다 거리가 변화되는 기적을 체험했다. 특히 1990년 말 정부가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해 유흥업소들이 철퇴를 맞았다.
당시 검찰청 김승연 강력부장이 나를 만나자고 했다. 범죄와의 전쟁에 성과를 내야 하는데 방배동 카페 골목 정화를 모델로 삼자는 것이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좋다고 말했다. 부장 검사님 경찰이 단속 나오기 전 정보가 미리 샙니다. 유흥가 먹이사슬에 종지부를 찍어야만 했다. “구청과 경찰이 모두 한통속입니다.” 라고 했다. 그러자 부장검사가 평검사 한 명을 이 골목에 상주시켜 주겠다고 하고 지원해 주었다. 우리는 기도한 것 밖에 없는데 모일 때마다 연속해서 기적이고 기쁜 일이 일어났다. 91년 걸프 전쟁이 발발하면서 국제유가가 요동쳤다. 정부가 범죄와의 전쟁뿐만 아니라 심야 영업도 금지시켰다. 10시 이후에 네온사인도 못 켜게 했다. 카페라는 용어도 못쓰게 하므로 간판들이 정리됐다. 담배꽁초나 오물 버리는 자에게 벌금형도 내렸다. 또 다음해엔 카페 골목에 홍수가 났다. 한 번도 그런 일이 없던 곳이다. 이 일로 지하 주점들이 모두 침수돼버렸다. 무더기로 술집들이 망해서 울상이지만 나는 장화를 신고 온 동네를 신나서 돌아다녔다. 수많은 퇴폐업소들이 문을 닫고 5~600여 명의 삐끼들이 점차 사라지고 건전한 거리로 바뀌었다. 이 운동은 2006년까지 지속했다. 교회가 교회 밖 창궐하는 악의 현장, 그 길목을 밟고 다니면서 무관심하고 외면할 수 있다. 교회 밖 100m, 200m 코앞을 변화시키는데 교회가 무력하거나 영향을 미칠 수 없다면 문제다. 지역사회를 교회들이 변화시킨 방배동 우리 동네 기도회는 성시화 운동의 모범 사례가 되었다.
두상달 장로
• 국내1호 부부 강사
• 사)가정문화원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