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돌아 본 삶의 현장] 릴리하의 한인기독교회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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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다니다가 이 섬을 떠난 사람들이 이 섬을 다시 찾으면 화려한 옷을 입고 자랑삼아 친구들을 한 번에 많이 만나보려고 교회에 오는 것 같았다. 교인들은 또 친정에 들리는 식구를 맞는 것처럼 반가워 수다를 떨었다. 들고 온 도넛이나 준비해 놓은 커피를 누구나 먹고, 마시며 자유롭게 담소했으며 애연가들은 담배를 피웠다. 성가대원도 마찬가지였는데 그렇게 지내다가 “자 연습하러 갑시다” 하고 지휘자가 손뼉을 쳐 신호하면 모두 담배를 비벼 끄고 연습장으로 들어가 가운을 갈아입었다. 헌금 주머니를 돌리는 일이 없었다. 준비된 봉투에 이름을 적어 헌금함에 넣는 것인데 누가 언제 헌금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목사는 세금공제도 있어 연말까지는 다 필요한 헌금을 내준다고 걱정하지 않았다. 한국에서는 교회에 오면 경건해지고 집에 가면 자유로워져서 해방된 것 같은 그런 느낌이 좀 들었는데 여기서는 밖에서의 생활이 긴장되고, 힘들고, 건조하며 교회가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고 쉬고 양로원을 찾아가고 하는 즐거운 잔칫날 같이 여겨졌다. 그러다 보니 이곳이 세상 같고 교회 같은 생각이 안 들었었다. 성수주일이니, 십일조니, 새벽기도니, 철야기도니, 금식이니 이런 말도 없고 또 수요예배는 아예 없었다. 그러면서 어떻게 교회라고 할 수 있는가? 나는 긴장된 한국의 교회 생활에서 너무나 느슨한 미국의 교회 생활로 바뀌면서 적지 않은 당혹감마저 느꼈다.

이 교회에는 루시(가명)라는 중년 부인이 있었다. 고등학생인 딸을 가진 분이었는데 성격이 명랑하고 한국 학생들에게 그렇게 친절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한국 학생들을 보면 너무나 자랑스러운 모양이었다. EWC 학생들을 만난 뒤로는 한국인인 것 자체가 자랑스러워지는 모양이었다. 직장에서 자기를 돕는 여종업원 수명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그녀는 그들을 모아놓고 세계에서 가장 배짱(gut)이 좋은 사람은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물어서 “한국 사람이요” 하면 점심을 사준다고 말했다. 하와이에서는 한국 사람들이 노름꾼의 자식들이라고 천시당해 왔는데 EWC에 한국 대학생들이 들어온 뒤로 점차 명예회복이 된 것이다. 특히 지난봄에는 선명회 무용단이 와서 부채춤을 추었는데 얼마나 하와이 사람들이 열광적으로 칭찬을 했는지 둘째 날에는 국적을 감추고 살던 한국인 2세들이 치마저고리를 입고 나와서 한국인임을 드러냈으며 또 한국 사람들로부터 한복 선물을 받은 외국 사람까지도 모두 한복을 입고 나와 자랑을 했기 때문에 적지 않게 국위가 선양되었다. 

우리는 교회에 갈 때, 쇼핑하고 싶을 때, 또 외로우면 시간이 어떠냐고 물어서 루시를 끌어냈었다. 미국독립기념일에도 그녀는 기꺼이 시간을 내주었다. 우리는 알라모아나 쇼핑센터에서 그녀가 사준 점심을 먹고 또 실컷 물건을 사러 돌아다녔다. 미제 물건을 좋아했던 때였다. 냉장고, TV, 아이스박스, 녹음기, 그리고 타자기 등 고국을 떠날 때부터 친구나 가족으로부터 여러 가지 주문을 받은 학생들이 많았다. 집으로 사서 들고 귀국할 것을 고르는 사람도 있었다. 대부분 1년이나 2년이면 귀국할 학생이었기 때문에 쇼핑에 흥미가 많았다. 쇼핑이 끝나자 드라이브하며 오아후섬을 일주했다. 민요로, 유행가로, 가곡으로 쉬지 않고 목청을 돋우어 불러댔다. 그녀는 목소리가 참 고왔다. 우리는 ‘가고파’를 가르쳐 주었고 그녀는 ‘해변 저 멀리’를 우리에게 들려주었다.

검고 찬 바다의 해변 저 멀리/ 내 사랑은 가고 꿈은 바랬네/ 그러나 울지 않네. 후회하지 않네./ 그는 나를 기억할까? 벌써 잊었을까?//

아! 나는/ 계절풍에 실어 수많은 꽃을 보내리/ 나의 사랑하는 마음도 함께./ 그처럼 나는 사랑하네.//

나는 아네./ 그가 다시 내 품에 안길 것을./ 그때까지 내 마음은 표류하네/ 해변 저 멀리를.

오승재 장로 

•소설가

•한남대학교 명예교수

•오정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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