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돌아 본 삶의 현장] 릴리하의 한인기독교회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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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의 남편은 도박꾼이었다. 돈을 다 날리면 집에 돌아와서 울며 용서를 빌었다. 그러나 빚을 갚아 주면 다시 도박판에 뛰어들고 또 신수가 좋을 때는 여자를 차고 다니곤 했었다 한다. 당시는 라디오 방송에서 호텔 앞에 세워 놓은 차가 시한폭탄으로 날아갔다고 말하면 또 자기 남편이 관련된 것이 아닌가 하고 가슴이 떨렸었다고 말했다. 그녀는 남편과 헤어진 지 오래되었었다. 그리고 더는 남편을 기다리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녀가 이 ‘해변 저 멀리’라는 하와이 노래를 부르면 감미로우면서도 슬프게 들렸다. 

루시와 나는 교회가 끝나고 양로원 방문도 하였다. 한국인의 눈으로 본다면 시원찮은 교회, 교회 같지 않은 교회인데 여러 가지 일을 하고 있었다. 한적한 시골길을 한 시간쯤 달려서 야자수가 시원하게 솟고 관리가 소홀한 한 판잣집 앞에 차를 세웠다. 그녀는 도넛이 든 상자를 들고 나는 김치가 든 병을 들고 따라갔다. 노크도 없이 판자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앞치마를 두르고 머리가 반백이나 된 뚱뚱한 할머니가 반색하고 나오더니 루시를 안고 어깨를 두들겼다. 그녀가 루시의 어머니였다. 부엌 옆 홀에는 대여섯 분의 할아버지들이 질서 없이 앉아 TV를 보고 있었다. 그들은 출입하는 사람들에게 별로 관심이 없는 모양이었다. 모두 쭈글쭈글 늙은 할아버지들이었다. 루시는 아주 큰 소리를 질렀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오늘은 여러분께 특별한 손님을 모시고 왔습니다. 한국에서 두 달 전에 온 이분은 미스터 오입니다.”

그러자 방 안 분위기는 바로 변하였다. 모두 일어서서 나를 반기더니 한 노인이 나를 얼싸안았다. 

“우리 씩씩한 대한 청년이 왔구먼.”

그는 고목처럼 힘이 없었으며 손은 말라버린 나무껍질 같았다. 그들이 1903년 하와이의 설탕 농장으로 이민 온 노동이민자들이었다. 지금은 자녀들이 다 본토로 가버리고 거의 돌아보지 않은 그들을 이 섬에 남아 있는 교인들이 매주 교대로 방문해 주고 있는 것이었다. 젊어서는 어렵게 모은 돈을 독립 자금으로 보내고 멕시코에 노예 상태로 팔린 노동자들을 구해내기 위해 의연금을 냈던 분들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무기력하게 되어 죽음만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역사책에 임시정부에 독립 자금을 댄 재미 교포 어쩌고 하면 투사 같고 거인 같은 그런 모습이 떠오르는데 막상 보고 있는 이 할아버지들은 그런 기상이 전혀 없었다. 다만 ‘우리 씩씩한 대한 청년’이라는 어귀가 퍽 인상적이었다. 

이 교회 성가대원은 20명도 되지 않았는데 크리스마스 때는 메시아 공연도 하였다. 세계에서 가장 배짱 좋은 국민은 한국인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지휘하는 조 씨는 걱정하지 않았다. 그는 하와이 원주민과 별로 구별이 안 되는 피부와 뱃심 좋은 든든한 체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우람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 크리스마스 시즌에는 와이키키 해변의 일류 호텔에서 메시아 공연을 한 번 해봅시다.”

12월 23일 밤 3개월 가까이 연습한 메시아를 와이키키 해변 일리카이 호텔의 로비에서 공연하였다. 관광객들은 훌륭한 메시아 공연을 보지 못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다만 이국적인 하와이에서 더욱 이국적인 흥분을 원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들은 한복을 입고 메시아 공연을 하는 색다른 이민족이 이채로웠을 것이다. 테너와 베이스, 소프라노에는 평소에 라디오 출연을 하는 가수들이었으므로 우리는 그들을 믿고 대담한 모험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할렐루야> 합창의 마지막 클라이맥스인 「할렐루야에서 주어진 박자를 참아내지 못한 학생 중의 하나가 반 박자 먼저 ‘할’ 소리를 발음했기 때문에 진땀을 뺐지만, 청중들은 모두 박수를 하고 칭찬했다. 미국교회는 그런 곳이었다. 남에게 기쁜 성탄을 선사하고 우리는 모두 자기 돈으로 저녁을 먹고 자축하였다.

오승재 장로 

•소설가

•한남대학교 명예교수

•오정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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