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감사의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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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은 2년여 간의 긴 여정을 코로나 팬데믹과 씨름하며 견뎌내고 있다. 경험하지 못한 마스크 쓰기가 일상화되어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빈 얼굴만 보면 피하게 된다. 총칼로 이 나라를 침탈하려는 청국과 일본의 각축장이 된 그때에도 개인이 얼굴을 가리고 일상생활을 하진 않았다.

6.25 동란이 발생하여 북한군의 무자비한 군화 발에 짓밟히며 목사와 장로들 심지어 평신도들 까지도 짐승 다루듯 사슬에 매여 북한으로 끌려갈 때에도 백성들의 입막음은 없었다. 그때 북한괴뢰를 피하여 믿음의 식구들이 지하 움막에서, 캄캄한 이불속에서 조용히 성경말씀에 귀 기울이며 믿음을 지켜왔다. 너무 잘살아 하나님을 멀리하고 입으로 세상과 짝하여 살았기에 입을 막아버리신 것 아닌가 생각해 본다. 그리고 코로나19 확진이 퍼지자 제일 먼저 교회의 문을 닫아 예배도 영상으로 만족해야 했다. 이제 젊은이들은 비대면 예배에 맛 들어 교회 출석을 멀리하고 영상 예배에 만족하며 살아간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도 교회는 열심인 노 권사님들이 지켜왔다. 벌써 늦가을이 되어 바람에 출렁이는 황금들판에도 잘 익은 곡식들이 농부들의 땀의 결실로 가을걷이가 끝나간다.

필자는 하나님 사업에 진력하며 문서선교에 매달렸다. 1877년 스코틀랜드의 존-로스 목사는 만주의 심양에 자리를 틀고 복음 전할 곳을 조선 땅에 목표를 정했다. 조선의 작은 통과문을 바라보며 백홍준, 서상륜, 이응찬 3인을 한글 선생으로 모시고 성경을 번역하는 일을 시작한다. 희망이 없는 암흑 땅에 하나님께서는 빛을 주셨다. 드디어 1882년 한글로 된 누가복음이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성경으로 조선 사람들이 눈이 밝아지고 한글을 깨우쳐 성경을 읽고 삼삼오오 모여 가정교회가 조정 몰래 들어서기 시작했다. 서상륜은 소래까지 내려와 1883년 최초로 소래교회를 설립하였다. 1885년 4월 인천 제물포에 언더우드 목사와 아펜젤러 목사가 한국 땅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일본에서 이수정이 번역한 마가복음이 그들의 손에 들려 있었다. 새문안교회가 창립되는 1887년 9월 27일 성경을 번역, 출판한 존-로스 목사가 초청되어 14명이 세례를 받는 기쁨의 자리를 같이했다. 1895년부터 대영제국의 재정적 지원으로 종로에 대한성서공회 지부가 설립되어 성경이 번역되고 한글로 출판되기 시작했다. 드디어 1979년 대한성서공회는 국내의 각 교회가 지원하여 재정적 자립으로 국내는 물론 세계복음화에 횃불을 들었다. 이제 우리는 복음의 빚을 갚을 때가 온 것이다. 대한성서공회는 세계 146개의 성서공회에서 4번째로 많은 성경을 보내는 국가로 우뚝 섰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못살고 가난하던 대한민국을 세계에서 10위의 경제대국으로 일으켜 세우셨다. 성경 한 권을 18명이 나눠보는 콩고는 코로나19로 집에서 움직이지 못하는 어려운 이때에 성경을 보내달라고 간절한 손을 내밀고 있다.

누군가 해야 할 복음서의 전달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40일을 제자들과 세상을 다니며 많은 이적을 행하시고 마지막 천사들에게 들어 올려 가시기 전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 ‘사도행전 1장 8절’의 말씀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는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는 말씀이다. 우리에게 주신 명령을 지킬 때가 온 것이다.

한 생명을 구하는 이것이 바로 우리 교회가 해야 할 일이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 말씀하셨다. 여러분께서 한 권의 성경을 아프리카와 아시아와 남미, 그리고 동유럽에 보내어 한 생명을 구하는 아름다운 손길이 시작되기를 바란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시작해야 할 감사의 조건이다.

최정선 장로

<대한성서공회문서선교사, 새문안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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