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 김영훈 목사와 믿음의 과정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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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양(萊陽) 방문 3일째 되는 2013년 11월 11일(월요일) 오전에 우리 일행은 래양 서관(西關)을 방문하였다. 래양 서관 지역은 남관(南關) 지역과 함께 래양교회 역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지역이다. 

100년 전 래양에 도착한 우리 선교사 일행 김영훈, 박태로, 사병순 목사 가정은 래양 서문내(西門內)에서 래양교회를 시작하였다. 

1913년 가을, 김영훈, 박태로, 사병순 선교사에 의해 시작된 래양 선교는 방효원, 홍승한, 박상순, 이대영, 김순호, 방지일(方之日) 선교사로 이어지면서 즉묵(卽墨)과 청도(靑島)로 확대되었고 방지일 선교사가 1957년 9월에 중국 공산정권에 의해 추방되기까지 45년 동안 지속되었다. 

이미 언급한 대로 조선(朝鮮)예수교장로회 총회의 중국 산동(山東) 선교는 1913년에 시작되었으며 목사 선교사 8명과 여선교사 1명이 참여하였다. 그리고 선교사로 파송된 것은 아니지만 임시전도인 김병규 조사, 의사 3명(김윤식, 주현칙, 안중호)이 의원을 설립하여 선교사와 협력하였고 선교사 자녀교사 3명(조소임, 리영애, 편순남), 전도인 1명(김병규)이 귀하게 협력하였다. 

중국 산동성 선교사로 활동한 목사 선교사 8명 가운데 선교사역을 마치고 귀국하여 장로교 총회장을 지낸 인물이 3명이며, 1917년 제6회 총회부회장 홍승한 목사는 1917년 가을 선교사로 파송되었다. 중국 선교사 활동을 마치고 첫 번째로 총회장을 지낸 인물이 바로 김영훈 목사이다. 

김영훈 목사는 1878년(단기4211年) 5월 3일 평북 의주군 월화면 호암동에서 김유현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의주 사람 김영훈은 1913년에 사병순과 신학교를 졸업하였으며 당시 나이 36세였다. 

그의 부친 김유현은 1853년생으로 1880년(고종 17년) 무과갑과에 급제하여, 백마별장, 1887년 친군서영우령관, 1893년 별군직, 1894년 위원군수, 1895년 8월 정주목사, 동 11월 육군참령으로 황평양서진위대대장, 1900년 7월 의주진위대대장, 동 12월 의주군수 등을 역임하고, 1903년 강계진위대대장에 전임되어 1904년 노일전에서 패하여 돌아가던 노군부대의 행패를 막아 싸우다 인풍루전진에서 전상, 익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모든 관직을 내던지고 귀향, 기독교인이 되어 신앙생활로 여생을 보낸 인물로 알려져 있다. 

김영훈은 부친 김유현이 복음을 듣고 믿기 시작할 때 아우 영순, 영률도 동시귀도(同時歸道)하였다고 전한다. 부친이 의주군수와 육군참령을 지냈으니 그의 가정형편을 대략 가늠해 볼 수 있겠다. 

조선(朝鮮)예수교장로회사기(史記)에 의하면 1905년경 기독교신앙에 입문한 것으로 보인다. 기독교문사에서 발행한 ‘기독교대백과사전’에는 김영훈이 1897년 김관근 목사의 인도로 기독교에 입교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김영훈과 그의 가족은 기독교 신앙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한국기독교 개척자의 한 사람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백홍준과 그의 사위 김관근에게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한국기독교 수용과정을 말할 때 처음으로 등장하는 지역이 바로 의주인데, 의주 지역에서 활발한 활동을 한 백홍준, 그리고 그의 사돈이 되는 김이련, 사위 김관근이 개종하면서 한국 최초의 가족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었고, 그의 일문인 김영훈 가정도 결국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김영훈은 그의 아우들과 함께 비교적 유복한 가정에서 성장하면서 한학과 서예 및 예의범절을 익혔다. 김영훈은 자신이 단기 4219년(1886)부터 4237년(1904)까지 한문, 작서를 배웠다고 하면서 자신의 최고 장기는 한문(漢文), 시문(詩文), 사자(寫字)라고 하였다. 

단기4237년(1904)부터 4238년(1905)까지 관리직으로 시찰부 주사 일을 보았다. 4238년(1905)부터 4242년(1909)까지는 가정관리에 주력하였고, 4242년(1909)부터 4245년(1912)까지는 의주에서 조사, 장로 등의 직책으로 전도활동을 하면서 5년 동안 신학을 공부하여 1913년 졸업하고 산동 선교사로 가게 된 것이다. 

김영훈의 온 가족이 예수님을 믿게 된 후 인근에 열심히 복음을 전하여 곽경락, 백사준 등 50여 명이 믿기 시작하였고, 김영순 사저에서 예배드리다가 합심하여 예배당을 건축, 교회가 발전하게 되었다. 

부친의 개종과 함께 기독교 가정에서 청년기를 보낸 김영훈은 목회자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그가 목회자가 된 동기는 알려져 있지 아니하다.

김영훈은 평양에 설립되어 있던 대한예수교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여 5년간 신학수업을 받았다. 당시 학생들은 각기 자기들의 교회 일을 보면서 1년에 3개월씩만 학교에 출석하여 전적으로 공부하게 하는 제도에 따라 5년 동안에 신학교의 모든 과정을 수료해야 했다. 

김교철 목사

<전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GMS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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