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가 밝았지만 우리의 마음은 그렇게 밝지만은 않다. 코로나는 여전히 언제 끝날지 모르고 오미크론 변이의 소식이 우리 마음을 어둡게 한다. 정치 현실은 더욱 암담해 보인다. 대선을 앞두고 우리나라의 새로운 미래 비전을 제시하기는커녕, 서로의 치부를 들추고 비난과 비방을 서슴치 않는 정치인들을 보면서 깊은 실망감을 감출 수 없다. 우리 사회의 희망이 되어야 할 한국교회는 또 어떤가? 우리 모두 한국교회의 문제점은 잘 지적하지만 참다운 대안과 비전은 제시하지 못한다.
필자는 새해 벽두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서 여러 선각자의 글을 찾아보는 중에 한 일본 기독교인의 글이 눈에 들어 왔다. 이 글이 우리의 현실에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고 생각되기에 여기에 소개해 보고자 한다.
우치무라 간조(內村監三)는 일찍이 일본 근대개화기 기독교인으로서 일본의 정신적 스승이 된 위대한 사상가이다. 그는 1890년대 쓴 “어떻게 오늘의 난마(亂麻)에 처할 것인가”라는 짧은 글에서 당시 일본의 암울한 현실을 진단하고 희망을 어디서 찾을 수 있는지를 제시하고 있다.
그가 묘사하는 당시 일본의 현실이 어쩌면 그렇게 오늘날 우리와 같은지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일본에는) 지도자가 없는데 더하여 일치의 관념이 없고, 형제가 서로 다투고 시비와 의심으로 가득 차 있다…. 일본의 상인들이 무역 시장에서 늘 실패하는 것은 단결심이 없기 때문이다…. 어느 외국인이 말하기를 일본 사람은 자기 형제조차 믿지 않고, 나라는 당파로 갈라지고, 서로 화합할 수 없는 원한과 적의가 있다고. 이익을 따라 합하고 이익을 따라 갈라져서 하나의 대의로 뭉치는 일은 찾아볼 수 없다. 회의가 있을 뿐 확신이 없다. 호소할 불평만 있고 세상에 나타내 보일 환희와 만족이 없다….”
이런 암울한 현실에 처해서 우치무라 간조는 먼저 혁신은 나 자신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른 사람에게 혁신을 요구할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먼저 변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로는 먼저 자기 스스로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 수신(修身)하지 않고 평천하(平天下)할 수는 없다. 자기 자신을 정복한 자만이 나라와 사회와 교회를 구할 수 있는 것이다.
셋째 자기의 회의를 세상에 나타내지 말라고 조언한다. 회의를 서슴없이 말하는 사람은 고통을 호소하는 환자와 같아서 부끄러운 일이다. 세상에는 이미 많은 의문이 있는데 새삼스레 또 의문을 여기에 보탤 필요가 없다. 만약 낡은 학설을 부정하려거든 먼저 마음에 그보다 나은 확실한 주장을 가진 다음에 반박할 것이다.
넷째 큰일을 하겠다는 생각을 버리라고 말한다. 사회의 지도자가 되겠다고 생각한다면 먼저 작은 일부터 실천하라. 네 가족과 이웃에게 작은 선행을 실천하라. 그런 연후에야 비로소 사회를 개혁할 수 있을 것이다.
다섯째 남을 비판하지 말라. 우리는 확신과 진실이 어디에 있든지 존중해야 한다. 개혁은 선행을 권장하는 데서 오는 것이지 결점을 지적하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선한 면만을 인식하는 사람은 큰 부자라 할 수 있다. 우리가 가난한 것은 사람의 결점을 들추어내는 데 바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는 말한다. “지금은 난마요 암흑시대이다…. 그러나 난마는 표면적이다. 우리 마음의 깊은 바닥에는 영원한 평화와 기쁨이 있다. 그런 깊은 심령의 만족 가운데 기다리고 때가 이르면 역사를 바꿀 힘이 솟아날 것이다.” 필자는 지금 우리에게도 이것이 희망의 메시지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김완진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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