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 중국 산동성 래양에서의 선교 과정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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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중화민국 선교사로 래양에 파송되어 선교한 홍승한 목사는 언어공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世上에 學키 容易한 文字는 別無하되 中國漢文字란 것은 字數의 繁多와 字義의 變動과 聲音의 分別이 千態萬象이라 學키 甚難하여 十年 以上을 學習하여야 書冊을 看透하고 章句를 製作하는 故로 富家子弟나 能히 入學하고 貧家子弟는 能히 하지 못함으로”

선교사 사모들은 어떠하였는가? 가사노동과 자녀양육 등으로 중국어를 제대로 익혀 나갈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지 못하였고 심한 답답함과 우울증에 시달려야 했다. 사모들은 집안에 관계된 수많은 매일의 잡다한 일들과 일상생활의 불편함 등을 견뎌나가야만 했다. 

목사 선교사의 사모들 역시 본국의 여러 가지 편리함과 즐거움들을 더욱 그리워하게 되었다. 쌀이 없으므로 대신 소미 밥을 먹을 수밖에 없었고 중국말을 익혀 나가는 것이 어렵기만 하였다. 아이들이 병에 걸려도 어디 마땅히 찾아가서 진찰과 처방을 받을 수도 없었다. 

시간이 흘러갈수록 선교임지 래양현 서문내에서의 생활은 어렵기만 하였다. 

래양현에서의 첫 겨울을 어떻게 보냈을까? 고국의 온돌방이 그리웠을 것이다. 중국인들은 우리와 주거문화가 다르니 중국인 가옥에서의 생활도 불편함이 많았을 것이다. 가옥의 불편, 고국과의 전혀 다른 식습관, 언어, 친숙하지 못한 여러 가지 문화적 요소들, 질병에 대한 염려들, 사소한 불편들로 충격을 경험해야 했다.  

래양 선교방법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는 ‘전도와 교회개척’을 목적으로 목사안수 받은 자를 선교사로 선택하여 파송하였다. 김영훈 선교사 역시 목회훈련과 신학공부를 통해 목사 선교사로 기본적인 준비가 되어 있었다. 

조선 선교사들은 선교지 산동에 도착한 이후 문서를 통한 전도를 시작하였고 1915년 가을과 겨울에 오륙인(五六人)의 신입 교인을 얻어 교인이 모두 30여 명에 이르게 되었다. 그리하여 교인의 총수는 40여 명, 평균 30여 명이 회집하였다. 

1913년 10월에 도착하여 11월에 래양교회를 시작하고 1914년과 1915년 두 해가 지난 시점에 교인이 40여 명에 이르게 된다. 김영훈 선교사는 신학 동기 사병순 목사와 선배 박태로 목사와 서로 협동하는 가운데 업무분담을 하면서 선교활동을 하였다. 

그리하여 1915년에는 처음으로 중국인 3명이 세례를 받게 되었다. 

첫 수세자 가운데 장수명은 70세 된 학자로 한문과 한시에 능한 김영훈 선교사가 그 지방관에게 보낸 한시를 읽고 감동하여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예수교장로회 파송 선교사들은 과거의 나쁜 습관을 버리고 믿음의 선한 증거를 보인 중국인들에게 세례를 베풀기로 결정하였다. 

김영훈 선교사는 총회에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전도하는 방법과 교회를 처리하는 것을 개량하여 다 진리대로 행하고 주일강론회와 수요일 기도회를 설립한 일과”

조선 선교사들은 조선장로교회의 좋은 방법을 채택하여 주일강론회와 수요기도회를 설립하였다. 하지만 중국노회의 경우 조선 선교사들의 일하는 방침에 대하여 관망하는 태도를 취하였던 것이다. 게다가 조선예수교장로회가 교회를 세워 중국노회에 속하게 하고 따로 교회를 세우지 아니하겠다는 방침을 세우기는 하였으나, 선교사의 소속은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산하 노회에 두고 중국노회로 목사 소속을 옮기지 않은 상태였기에 처음에는 더욱 그러하였다. 

조선 선교사들의 이명은 1916년 가을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결정되었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의 중화민국 산동성 선교방침은 현지 교회와 연합하는 방식을 취하면서 전도와 교회개척에 주력하였다. 

1915년 성탄절에는 래양교회 30명 교우가 합동 연보하여 감옥에 들어가 죄수들에게 전도를 하는 등 열심히 전도하였다. 당시 래양에 세워진 교회는 완전한 조직교회가 아닌 전도실의 기능을 가진 미조직 교회로 복음당(福音堂)이라 불리워졌다. 

1916년 가을의 교세를 보면 세례인 12명, 원입인 30명, 회집 인원 40여 명에 매 주일마다 주일헌금이 팔구십 전으로 주일헌금 도합이 50원이었다. 래양교회 역시 초기부터 헌금을 드렸던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에서 선교사로 활동하였던 곽안련 선교사는 중국 요인들의 연보정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 선교사가 말을 통하여 전도하기 시작하자, 중국 교인은 연보에 대한 정신이 도무하기 때문에 교회에 돈 드는 일은 전부 의뢰하는 것뿐이었고”

교회에 돈이 필요하면 모두 선교사를 의지하려는 래양 교우들에게 선교사들은 비록 적은 헌금이지만 연보정신을 강조하여 중국 교인들도 헌금을 드리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중국교회를 위하는 하나의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선교사들이나 외부에 의존하지 아니하는 강한 토착교회가 세워져야만 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중국선교라는 이름하에 중국교회 건축과 전도인들 재정을 보조하는 일들은 장기적인 측면에서 볼 때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진정으로 중국교회를 위하는 길이라고 볼 수 없다. 

1920년대에 조선교회가 산동 선교지에서 중국인 전도인들에게 월봉 지불하는 문제에 대하여 강한 비판이 있기도 하였다. 

선교사자녀교육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선교사를 파송하기는 하였으나 선교사 자녀교육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책도 없는 상태에서 선교사와 그 가족을 파송하였다. 단지 매월 선교사 자녀비 항목으로 비용을 지출하는 것뿐이었다. 

김영훈 목사의 자녀는 모두 몇 명이었을까? 김영훈 선교사 가계도에는 두 아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1917년에 작성한 김영훈 목사의 흥사단 단원 이력서에 의하면 김영훈 목사는 아들 2명과 딸 3명을 두고 있었다. 

아들의 이름은 윤수, 초숙이며 딸의 이름은 순도, 순주, 마례이다. 장녀 순도는 1917년 당시 23세로 이미 출가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아들 윤수는 13세, 초숙은 6세로 되어 있다. 김영훈 목사의 사모 이름은 정신반이며 32세로 평안북도 의주군 비현면 영평동 출신이다. 

김교철 목사

<전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GMS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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