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부터 우리나라 농어촌 또는 산촌에는 마을(部落) 단위로 취락구조가 형성돼 있었다. 주로 혈연 공동체(집성촌)와 지역 공동체(마을)가 그것이다. 30-40호의 주택이 한 지역에 모여 살면서 같은 우물물을 먹었고 영농에서 서로 품앗이 협동이 이루어졌다. 관혼상제의 대소사를 동네 이웃들이 서로 협력해 큰일을 치루어냈고 별식이 생겨도 이웃들과 나누어 먹었다. 콩 한 쪽도 나누어 먹는다고 했다. 마을(Village/부락/촌락)이 기본적인 정주 단위였다. 현대 도시 아파트 생활에선 다 사라진 풍경이다. 바로 옆집 아파트에서 초상이 나거나 혼인이 있어도 모르고 지내니 말이다. 얼마 전까지 간헐적으로 볼 수 있었던 반상회마저 없어지고 보니 층간소음으로 다툴 일이나 생겨야 이웃과 위아래층 사람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옛날(조선시대)에는 마을 단위로 주민들이 모여서 공동생활의 규칙(규약)을 만들어 삶의 질서를 유지하고 경노효친의 윤리를 지켜가기도 했다. 역사 시간에 배운바 소위 향약(鄕約)이란 게 있었다. 이는 조선시대 향촌사회(마을)의 자치규약으로써 공동체 정신과 사회통합의 근거가 되기도 했다. 소위 여씨향약(呂氏鄕約)을 비롯해 ‘예안향약’, ‘서원향약’, ‘해주향약’ 등이 전해오고 있다. 좀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조선시대의 향약은 군현(郡縣) 단위에선 향안(鄕案), 향규(鄕規), 향악(鄕鰐), 향립약조(鄕立約條), 입법(立法), 일향입법(一鄕立法), 일향약속(一鄕約束), 입의(立議) 등으로 불렸고, 촌락(마을) 단위에서는 동안(洞案), 동계(洞契), 동약(洞約), 촌계(村契) 등으로 불렸다. 이런 향약의 기원은 북송(北宋) 말기 섬서성(陝西省)의 남전현에서 살던 여씨 4형제(呂大忠, 呂大防, 呂大釣, 呂大臨)가 일가친척과 향리 사람들을 선도하고 교화하기 위해 4가지 마을 자치 과정을 제정했는데 이것이 바로 ‘여씨향약’이다. 조선조 명종-선조때 중국의 이 향약이 도입되어 활용되었다. 1556년(명종 11년)에 퇴계 이황이 예안에 낙향하여 지방 교화 방안으로 만들었고(예안향약), 율곡 이이는 서원(西原/청주)향약과 해주향약 및 사창계약속(社倉契約束)을 만들었다. 크게 4가지 규약이 있는데 ① 좋은 일은 서로 권하고(德業相勸). ② 잘못은 서로 규제하며(過失相規) ③ 예의 바른 풍속으로 서로 교제하고(禮俗相交) ④ 어렵고 힘든 일엔 서로 돕는다(患難相恤)로 되어 있다. 예안향약에선 과실상규(징계)의 벌칙으로 ① 극벌 ② 중벌 ③ 하벌 까지 정해져 있었다. (A) 극벌(7개항) 대상은 ①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자 ② 형제끼리 싸우는 자 ③ 가도(家道)를 어지럽히는 자 ④ 관부(官府)를 간섭하고 향풍(鄕風)을 해치는 자 ⑤ 망녕되이 위세를 부려 관(官)을 흔들고 자기 맘대로 행동하는 자 ⑥ 향장(鄕長)을 능욕하는 자 ⑦ 수절하는 상부(孀婦)를 유인하여 더럽히는 자 등이요. (B) 중벌(16개항) 대상은 ① 친척과 화목하지 않은 자 ②본처(本妻)를 박대하는 자 ③ 이웃과 화목하지 않은 자 ④ 동무들과 싸우는 자 ⑤ 염치를 돌보지 않고 사풍(士風)을 허무는 자 ⑥ 강함을 믿고 약한 자를 능멸하거나 침탈하여 다투는 자 ⑦ 무뢰배들과 당을 만들어 횡포를 부리는 자 등. (C) 하벌(5개항)은 ① 공회(公會)에 지각하는 자 ② 문란하게 앉아 예의를 해치는 자 ③ 좌중에서 떠들거나 다투는 자 ④ 있어야 할 자리를 비워놓고 딴 데 가서 편하게 지내는 자 ⑤ 보고 없이 모임에서 먼저 떠나는 자 등이다. 그리고 공직자 중 원악향리(元惡鄕吏)에 해당되는 자로 ① 민가에 폐를 끼치는 자 ② 공물(貢物)값은 부당하게 징수하는 자 ③ 서인(庶人)으로서 문벌 있는 자를 능멸하는 자를 열거하고 있다. 조선시대 기초공동체를 유지하는 약속들이다. 이런 규약을 적용해볼 때 최근 국회의원들로서 뽑아준 유권자는 안중에도 없고 자기들의 추악한 죄과를 처벌받지 않기 위해 국가의 기본 틀을 깨는 자들은 모두 향약의 극벌 대상자임을 밝혀둔다.
김형태 박사
<한남대 14-15대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