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 중국선교 100년과  김영훈  목사 (20) 조국에서의 목회 활동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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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유아원은 1920년에 설립비(設立費) 1,500원으로 설립되었으며 1928년 당시 보모(保姆) 2명과 원아(園兒) 67명이 등록되어 교회 보조와 유지(有志)의 동정(同情) 그리고 보육료(保育料) 등 수입지출금 486원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 김영훈 목사는 1928년 2월에 분규사건으로 혼란한 경남 마산교회(現 마산문창교회)를 방문하게 되었다.

마산교회는 한국기독교사에 이름을 날렸던 한석진, 함태영, 주기철 목사 등이 시무하였던 교회이다.

마산교회는 1925년 1월 9일에 박승명 목사 위임식을 거행하였으나 그가 위임을 받은지 2년도 못되어 간음미수 추문(醜聞)이 퍼지게 되고 이를 시작으로 교회는 결국 양파(兩派)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박승명 목사 후임으로는 총회의 특별위원으로 왔던 함태영 목사가 담임으로 부임하였다.

함태영 목사는 본래 법관양성소를 졸업하고 판사와 검사(檢事) 일을 보던 사람으로 평양 신학교를 졸업한 후 목사가 되었으며 1923년에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해방 후에는 부통령을 지내기도 하였다.

함태영 목사는 마산교회의 분규가 진행 중이던 1927년 12월에 부임하였으며 당시 총회장이던 김영훈 목사가 전보(電報)로 급하게 와 달라고 도움을 요청하였다.

1928년 2월 10일에 함태영 목사의 전보를 받은 김영훈 목사는 신의주를 거쳐 밤 10시 급행열차로 2월 11일 오전 9시쯤 마산역에 도착하였다.

마산역에는 함태영 목사와 맹호은 선교사 그리고 마산교회 제직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총회장 김영훈 목사가 급하게 부른 이유를 함태영 목사에게 질문하니 그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고 적고 있다.

“지금 독립파(獨立派) 교우들이 황해도 감리회 목사 황치헌(黃致憲) 씨를 청하여 사경하는 중인데 기회가 좋은 고로 총회장을 청하였다 하며 한 예배당에서 두 파가 갈려서 예배함이 하나님 앞에 황송할 뿐 아니라 피차 은혜는 고사하고 소란이 생긴다고 근심함을 보았다.”

마산교회는 한 예배당을 두고 두 파가 갈려서 서로 예배를 드리던 형편이었다.

한국교회는 마산교회 분열 전후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각 지방에서 수많은 교회들이 여러 파로 갈라져서 서로 심한 싸움을 하였고 그 결과 교회들은 증가되었으나 불신자들에게 손가락질을 받는 일들이 사방에서 발생하였다.

한국교회의 미성숙한 목회자들과 교인들이 만들어낸 합작품들이 한국교회를 멍들게 하였다.

김영훈 목사는 1928년 2월 12일 주일 오전 11시에 마산교회에서 ‘믿음의 생활’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였다.

주일예배는 함태영 목사 인도로 시작하였으며 회중은 남녀 300여 명에 경남노회장 리자익 목사, 노회 특파원 김만일, 선교사 맹호은, 황치헌 목사와 독립파의 몇 사람이 함께 참여하였다.

김영훈 목사의 설교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말하다가 아브라함이 그 조카 롯에게 행함같이 독립파에게 예배당을 줄지언정 서로 다투는 것은 옳지 않다는 내용이었다.

김영훈 목사는 예배를 마치고 황치헌 목사를 만나게 되는데 만나보니 구면(舊面)이었다.

황치헌 목사는 20년 전에 평양 신학교를 일년(一年) 동안 같이 공부하였던 벗이었던 것이다.

서로 인사를 마치자 황치헌 목사는 독립파 예배에 설교하기 위하여 강단에 오르고 김영훈 목사는 함태영 목사 사택에 가서 점심을 먹으며 교회 일을 이야기하는 가운데 대구에서처럼은 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였다.

사실 대구교회(現 대구제일교회)는 홍승한(洪承漢) 목사가 위임목사로 담임하던 교회였으나 1917년에 김영훈 목사가 떠난 중국 산동 지방에 선교사로 간 이후에 이만집 목사 자치파(自治派) 사건이 발생하여 분규가 오래 지속되면서 만신창이 되어 있었다.

총회장 김영훈 목사가 여러 목사와 더불어 함태영 목사 사택에 가서 짐심을 먹으며 교회 일을 이야기 하는 가운데 대구에서처럼은 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할 때에 마산교회 직원 몇 사람이 웃음을 머금고 들어와 “총회 회장께서 설교한 것이 잘 되었습니다. 지금 독립파 예배에 참석하여 보니 황 목사가 ‘안전한 생활’이라는 문제로 설교를 하며 총회 회장까지 설교한 본뜻을 힘있게 증명한 후에 크게 소리질러 말하기를 여러분이 장로회의 불공평을 말하며 독립을 선언하고 그 예배당을 빼앗으려면 독립을 취소함이 옳다 사경회도 그만두는 것이 옳다고 말하매 일반이 분해하더라”고 전하였다.

1928년 2월 12일 밤 예배를 드리고 그 이튿날인 2월 13일 오후 1시에 김영훈 목사는 리자익, 김만일 두 목사와 더불어 손덕우(孫德宇) 씨 집으로 독립파 위원들을 심방하니 두 편이 서로 쳐다만 보고 무슨 말을 못하고 눈치만 볼 뿐이었다.

김영훈 목사는 먼저 입을 열어 “총회장이 재주와 덕이 없어서 여러분들로 불평을 품고 독립을 선언케 하였음은 황송합니다만은 독립을 선언한 원인을 한 번 듣고자 합니다” 말하니 독립파의 지도자인 김산(金山)이라는 청년이 다음과 같이 반문(反問)하였다.

“우리의 독립은 한 해에 생긴 연고가 아니요 당신이 이미 아는 바와 같으니 다시 물을 필요가 없지요. 겸사의 말인지는 모르나 전국 총회장으로 국내 교회의 사정을 알지 못함은 책임을 너무 가벼이 봄이 아닌가요.”

이에 총회장 김영훈 목사는 “조선의 총회장은 서양과 같이 각처로 순회하여 살핌이 없고 다만 보고에 의하여 사정을 약간만 들을 뿐이니 여러분의 독립 선언과 강령은 일찍 보았으나 자세한 이유는 들은 적이 없고 풍설에는 어떤 목사를 옹호하다가 이루지 못하고 마침내 독립을 선언하였다 하니 이 말을 믿을 수가 없음으로 한 번 듣고자 한다” 하매 김산이 독립교회 강령과 심득서(心得書) 한 장을 주고 다른 말이 없다가 김산이 독립파를 대표해 그 자리에서 말하기를 “어제 밤에 우리가 예배당은 장로회의 것인고로 장로회에 양도하기로 결의한 것을 총회장과 노회장, 노회 위원에게 말한다” 하였다.

이 말을 들은 김영훈 목사는 “여러분의 결의가 합당하니 감사하오. 만일에 이 결의가 없었더라도 다투지는 않을 것이요” 말하고 독립파와 작별하였다.

마산교회는 2월 13일 저녁에 예배당에서 함태영 목사의 위임식을 진행하였으며 김영훈 목사는 저녁 7시 차로 의주를 향해 출발하였다.

당시 독립파에 가담하여 제명당한 사람은 79명이었으며 예배당 쟁탈전이 계속되다가 총회장 김영훈 목사의 마산교회 방문으로 마무리가 되었다.

김교철 목사

<전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GMS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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