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유튜브에 어느 목사님이 다른 목사님의 설교를 공개적으로 비방, 비판하는 동영상이 있었다. 어떻게 생각하고 받아들여야 할지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보기 좋지도 않았다. 설교는 목사님에게 가장 위대하고 영광스럽고 고귀한 소명이자 사명이다. 회중은 하나님의 말씀을 목사님이 대신하여 선포하는 것으로 믿고 듣는다. 성경에 관한 지식을 얻으려면 책을 읽으면 가능하다. 그러나 설교는 지식을 얻는 것과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설교는 예배다. 때문에 정치인의 연설이나 웅변과는 다르다. 설교는 성경의 권위에 의한 것이다. 위대한 교조(敎條)에 관한 것이니 윤리나 도덕적 훈계나 사회적 담론과는 또 다르다. 권위가 상실되면 설교가 쇠퇴한다. 설교자가 흥행적 태도(Showmanship)로 회중의 감정을 자극하면 강단꾼 목사가 된다. 지나친 수사, 문학적 표현으로 수필 같은 설교, 유머로 지나치게 회중을 웃기거나, 철학적 지식을 나열하여 자신을 돋보이게 하는 설교는 듣기 원하지 않는다. 회중을 즐겁게 하기 위해 기교를 부리면 오락의 한 형태로 변질되는 위험이 있다. 회중을 향해서 인기를 의식하는 설교도 안 된다.
설교는 설교자의 전인격이 담겨져야 한다. 권위와 통제력을 가지고 예배 순서와 회중을 관장해 줘야 한다. 설교자는 위임받은 사람이다. 자신감이나 자신만만과는 다르다. 준비한 내용에 얽매이기보다는 성령으로 인도하심이 있는 자유함도 있어야 한다. 회중에게서 전달받는 무엇인가가 있으면 더 좋다. 회중 속에는 성령이 충만한 영적인 사람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설교자는 진지해야 한다. 설교자는 나아만(Naaman,왕상;1~5)의 집에 있던 그 어린 여종처럼 다른 사람이 모르는 답을 갖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하나님(예수님) 편에 서서 하나님(예수님)에 대해 말해야 한다. 지루함보다 생동감이 있어야 한다. 설교자의 열심과 관심과 뜨거움이 있어야 회중이 감동을 받는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이 불붙는 것 같다고 했다. 사도 바울은 눈물로 설교했다고 고백한다. 사도는 가볍고 편한 마음으로 강단에 올라서지 않았다. 오히려 ‘외모가 보잘 것 없고 말이 시원찮다’는 비난도 받았다. 고린도에 갔을 때 ‘약하여 두려워 떨었다’고 했다. 사도의 겸손에 놀라는 마음이다.
설득력이 있고 파토스(Pathos)가 있는 설교를 듣고 싶다. 영혼을 향한 연민의 사랑이 있을 때 파토스가 나온다. 나는 원고가 없어도 얼마든지 설교할 수 있다는 듯이 강단을 왔다 갔다 하며 설교하는 모습은 어지럽다. 교만하고 불안정해 보인다.
본문이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는 말씀이면 좋겠지만 그 외에는 명령조의 제목보다는 설교자와 회중이 공유할 수 있는 제목이면 더 좋겠다. 단정한 정장 차림이어야 한다. 넥타이도 매지 않고 이상한 색깔로 복장을 꾸미는 것도, 위호주머니에 행커치프를 꽂는 것도 세속적으로 느껴지며 불필요한 일이다. 여름철에 반소매 복장으로 올라서는 것은 설교자가 갖춰야 할 예의도 아니고 바람직한 모습은 더욱 아니다. 예복(禮服)이다. ‘몸가짐을 보면 그 사람을 안다’는 속담은 맞는 말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세상의 유행을 따라 하는 것은 보기에 민망스럽다. 설교자에게 겉치레는 필요 없다. 모든 것은 오직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면 되는 것이다. 설교는 듣기도 하지만 보기도 한다. 20세기의 대설교가 로이드 존스 목사는 “하나님의 진노를 알려주지 않는 설교는 진정한 복음 전도 설교라 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이 모든 것은 설교자의 독서량과 기도 시간에 비례할 것이다. 바라고 원한다고 이루어지는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설교가 그 생명력과 거룩함이 회복됨으로 한국교회가 소성하고 성장, 발전하여 하나님께 영광 올려 드리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드린다.
김용관 장로 (광주신안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