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록장편소설] ‘아버지는 풍금을 치고’ 연재를 시작하면서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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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내 딸아! 앞으로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렵고 괴로울 땐, 이 찬송가(아버지 십팔번 338장)를 불러라.” 아버지는 풍금을 치고 어린 막내 딸은 노래를 불렀다. 

소설 <아버지는 풍금을 치고>에서 아버지 춘원은 사랑하는 딸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예수 그리스도의 신앙(信仰)을 선물했다. 

나는 중⋅고등학교 시절, 벌써 춘원 선생의 작품을 거의 다 읽고 있었다. 

생의 58년 격동기에, 어떻게 그렇게 주옥같은 많은 작품들을 쓸 수 있었을까, 늘 감탄하면서 대학에 가서도 나는 문학을 전공하며, 춘원에 대한 관심은 나를 떠나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우리 근대 문학사에 춘원이 끼친 문학적 영향력은 정말 대단했다고 본다. 춘원은 백년 전에 벌써 자신의 작품을 통해, 국민에게 나라가 나아갈 길을 극명하게 밝히고 있었다. 작가의 시대정신이 뛰어났고 누구보다 애국심이 마음에 가득했다. 

그는 초기 봉건적 사회제도를 타파하고자 한, 사회사상가로서 가부장제를 배격하고, 자유연애를 주창하였으며 조혼의 폐습을 이야기하였다. 

‘무정(無情)’에서는 신교육을, ‘개척자(開拓者)’에서는 과학사상을, ‘흙’에서는 농민 계몽을 주창하였다. 춘원(春園)은 작가로서 분명 말하는 것이 많았다. 순수한 문학 감성으로 인간에게 감동을 주는 문학의 천재성도 유감없이 발휘한 작가였다. 

춘원은 분명 한국 현대문학에 큰 업적을 남긴 하나의 큰 별(星)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럼에도 그 별은 한 세기가 지나는데도 빛을 제대로 발하지 못하고 늘 짙은 구름에 가려, 지금까지 그의 문학적 업적은 몹시 폄훼되고 있다. 

그것은 춘원이 일제 강점기에 친일 변절하여 민족을 배신한 흠점이 많기 때문이다. 

그 이유로 춘원은 여태까지 그 흔한 자신의 문학관(文學館)도 제대로 갖지 못하고 있다. 참 안타까운 현실이다. 

춘원은 일제 강점기의 전반부에서는 동경 2.8독립선언문 초안을 기초하는 등 또는 김구의 상해 임시 정부에서는 독립신문을 발간하는 등, 여러 가지 모습으로 이 나라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한 독립투사였다. 

그러나 춘원은 자신만의 독특한 신념으로 말년에 친일로 돌아서서, 많은 사람들에게 실망을 안겨줬고 해방 후에는 그 죄로 ‘반민특위(反民特委)’에서 처벌을 받고 옥고까지 치렀다. 

그러나 그로부터 100년의 세월이 흘렀는데도 아직까지 춘원은 용서를 받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춘원의 친일 죄과가 너무나 컸었다는 이유다. 누가 춘원을 이렇게 단죄하고 있는가? 춘원의 유일한 혈육인 막내 딸 이정화 교수(85세)는 평생을 아버지 대신, 조국에 죄인의 심정으로 사과하며 미국에서 외롭게 살아가고 있다. 

그녀는 아버지의 억울함을 이렇게 하소연하기도 했다. 

“아버지는 일제 때는 일본인에게 끌려 다녔고, 대한민국에서는 ‘반민특위’에서 처벌받고, 북한에서는 ‘반동’이라고 잡아갔다. 우리 아버지의 영혼이 위로받을 곳은 이 세상에 아무 데도 없다”라면서 눈물짓던 딸의 모습은 지금도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다. 

채수정

 (본명 채학철 장로)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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