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돌아본 삶의 현장] 일하는 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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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을 갖게 되자 아내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겨 버리고 태평하였다. 그때 우리가 느꼈던 것은 우리는 하나님의 보호를 분명 받고 있다는 생각이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의 노예 생활에서 해방해 광야로 인도하셨다. 그때 뒤로는 추격하는 이집트 병사요 앞으로는 요단강이 가로막혀 있을 때 구름 기둥으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시는 느낌이었다. 댈러스에서 무의무탁한 신세로 동그마니 서 있을 줄 알았는데 한국에서 같이 살던 민 집사 내외와 송 목사 내외가 우리를 돕기 위해 미리 와 있었다. 

아내가 시작한 봉재와 내가 맡은 노동은 참으로 힘에 겨운 것이었다. 그러나 일거리를 찾지 못하고 2년 동안 헤맸던 아내와 나는 낯선 지역에 와서 방학 동안 일할 수 있는 자리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는 것이 마냥 기뻤다. 내가 일하는 창고에는 여성용 드레스가 가뜩 걸려 있었다. 패턴대로 주문을 맡아 만들어 보내온 것이었지만 언제나 재고가 쌓이게 마련이었다. 또한, 하청을 주어 만들어 온 옷들도 순서대로 걸려 있어야 했다. 

내가 하는 일은 이 옷들을 출고하기 쉽게 차례대로 정리하는 일이었다. 따라서 이쪽 옷걸이에 걸렸던 것을 다른 쪽 줄의 옷걸이에 옮긴다든가 또 걸려 있는 순서를 치수를 따라 바꿔 정돈해 놓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한꺼번에 옮기는 일이 되어 한두 개의 옷을 집는 것이 아니고 2, 30개를 한꺼번에 두 팔로 안아 다른 쇠줄 위에 거는 일이었다. 한 무더기를 양팔로 안으면 가운데서 옷이 빠져나가고 어쩌다 용케 잘 안고 옮겼다 생각하고 옷을 걸려 하면 키가 작아 잘 들어 올려지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이런 짓을 온종일 하고 나면 허리, 다리, 목이 쑤시고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다. 한 달쯤 했을까 이제는 이 일에 좀 익숙해졌다 싶을 때 공장장이 나를 불러, 옷을 옮기기가 힘이 들 테니 패턴을 찍어내는 일을 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패턴은 아주 넓고 큰 종이에 찍어내야 했다. 키 큰 미국 애들이 표준이었기 때문이었다. 롤러를 통해 기계가 돌아가는데 얇고 넓은 종이를 쫙 펴서 그 롤러 사이에 끼워 넣는 것인데 처음이 잘못 들어가면 복사 용지가 꾸겨져 망치곤 했다. 옆에서 가르치던 깡마른 여인은 신경질이 보통이 아니었다. 만일 내가 평생을 이런 일을 해야 했다면 나는 아마 미치고 말았을 것이다. 

아내와 나는 주말이면 임금으로 받은 수표를 은행에 저금하는 것이 즐거움이었다. 그러나 한 번도 쌓이는 일이 없이 들어오는 대로 집세로, 기름값으로, 채솟값으로 나갔다. 마치 광야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매일 하루분 만나를 주워 가지고 들어와서 먹고 나면 없어지는 그런 꼴이었다.

개학하자 나는 직장을 그만두고 학교에 통학했다. 막내는 초등학교를 걸어서 다녔고 나는 버스로 댈러스의 한 쇼핑센터에 차를 주차하고 거기서 대학까지 가는 셔틀버스를 탔다. 여기서 통학하는 학생이 많아 학기별로 패스를 사면 셔틀버스가 학교까지 데려다주었다. 아침 일찍이 아내를 직장으로 출근시키고 또 아내의 퇴근 시간에 맞춰 돌아와 아내의 직장으로 달려가는 분주한 일과였다. 공부가 위주인지 일이 위주인지 알 수 없는 바쁜 한 학기였다. 미스터파인에는 한국 부인들이 몇 사람 일하고 있었는데 어떤 남편은 으레 저녁밥을 안쳐 놓고 아내를 맞으러 오는 것 같았다. 온종일 재봉에 지친 여인들의 얼굴은 모두 유령같이 회색이었다. 그래도 남편을 보면 생기가 나는지 안색이 환해지며 소리를 질렀다. 

“자기 밥 안쳐 놓았어?”

집에 가서 또 밥을 해야 하는 일만 없어도 공순이들은 기쁜 모양이었다. 하나님께서 칠일째에 쉬게 하신 것이 그렇게 감사할 수가 없었다.

오승재 장로 

•소설가

•한남대학교 명예교수

•오정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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