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록장편소설] 수형번호 675호, 춘원 이광수 법정에 서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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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개조론>은 1922년 잡지 「개벽」에서 주창한 나의 간절한 논문이오. 나는 여기서 우리 민족이 나아갈 길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였소. 그러면서 고질적인 우리 민족성의 병폐 여덟 가지를 지적하였지.” “그게 뭐요? 말해 보시오. 우리 민족성이 지니고 있는 고질적인 병폐란?” 이광수는 하던 말을 잠시 멈추고는 이마에 촘촘히 배어나는 식은땀을 옷소매로 훔치고 있었다.

“뭣하고 있소? 정직하게 어서 말해 보시오!” 재판장은 아니꼽다는 듯 어서 말해보라고 재촉한다. 춘원은 또렷한 목소리로 다시 설명하기 시작했다. “첫째는 거짓말하기, 둘째는 공리공론 일삼기, 셋째는 표리부동한 성격, 넷째는 전문성의 부족, 다섯째는 낭비하는 습관, 여섯째는 위생관념의 부족, 일곱째는 용기의 부족, 마지막 여덟 번째는 결단력의 부족을 지적했소.”

“이런 것들하고 피고의 친일 변천은 무슨 상관이오? 피고가 일제 강점기 말년에 독립운동을 하다가 갑자기 친일 변절자가 된 것하고는?” 서순영 재판장의 질문이 날카롭게 날을 세웠다. 춘원은 침을 꿀꺽 삼키고는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어 천천히 말하기 시작했다.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그때 나는 도산 안창호 선생과 함께 감옥에 있었소. 거기서 나는 경천동지할 일본의 1급 비밀문서를 보았소. 물론 놈들이 나를 회유하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이것은 정말 장난이 아니었소.”

춘원의 굳은 표정이 그때를 상기하듯, 얼굴은 더욱 창백해지고 있었다. “그래 그 1급 비밀문서 내용은 무엇이며, 누가 감옥에까지 와서 피고에게 보여 줬다는 거요?”

재판관은 핏대를 세우며 또 질문을 던졌다. “이 문서에는 조선의 말살 정책 계획이 상세히 작성되어 있었고 특히 소름 끼치는 부분은…” 춘원은 이 대목에서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소름끼치는 부분이란 무엇이오? 어서 말해 보시오.” 재판관도 몹시 궁금하단 듯 독촉한다. “거기에는 살생부 블랙리스트가 붙어 있었소. 우리 조선인 젊은 지도자급의 씨를 말리는 계획인데 그 인물 리스트가 소상히 적혀 있었소.” “그 문서를 피고에게 보여준 사람은 누구요? 어서 말해 보시오.” 잠시 뜸을 들인 후, 춘원은 입을 무겁게 열었다. “도쿠도미 소호(德富蘇 峰)!”

도쿠도미는 어떤 사람인가? 그 당시 일본 정계, 언론계 통틀어 조선총독부에 가장 영향력 있었던 인물이다. 그러면서 그는 춘원을 양아들 삼겠다고 몹시도 접근했던 사람이다. 춘원의 마지막 진술이 이렇게 변명일색으로 확대되자 법정은 다시 잔잔한 소란이 일기 시작했다.

“그 1급 비밀문서를 보이면서 그 자는 피고를 어떻게 협박, 공갈, 회유했소?” 재판관은 마치 검찰관이 심문하는 것처럼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내가 일본 당국에 협조만 잘해 주면, 이 살생부 시행만은 막아 주겠다고 했소.” “그 협조란 무엇이었소?” “내가 일본의 주구(走拘)가 되어 주는 조건이었소.” “그래서 결국은 그 말을 믿고 피고는 일본의 주구가 되었단 말이오?” “네, 그런 셈이죠.” 잔잔한 소란이 일던 법정은 삽시간에 거칠게 다시 험악해졌다.

법정 여기저기 개소리 하지 말라! 춘원을 처벌하라!는 고함소리가 계속 터지고 있었다. “개소리 그만하고 이광수를 죽여라!” 라는 역사 단체 회원들의 구호는 점점 드세지고 거칠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피고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 친일을 했다는 말 아니오?” 

재판장은 고개를 빳빳하게 세워 최후 진술을 장황하게 설명하는 이광수에 힐난조로 반문했다. “네, 그렇소. 내가 걸어온 길은, 정경대로(政輕大路)는 아니오마는 그런 길을 걸어 민족을 위하는 길도 있다는 것을 알아주오. 내 진심은 먼 훗날 이 나라 역사가 심판해줄 것이오.” 춘원은 이날 최후 법정 진술에서 이렇게 당당하게 말하고 있었다.

채수정

 (본명 채학철 장로)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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