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이슈] 달란트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사람들 (330) 우남 이승만 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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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미국과의 투쟁…대한민국 성장 초석 

반대한 휴전협정 통과에 강한 ‘우려’ 표현

1951년 6월 23일 소련의 야코브 말리크(Yacov malik) 유엔 주재 대표에 의해 휴전이 제기되었다. 1951년 7월 10일부터 15일간 개성에서 휴전회담이 열렸다. 이승만은 결사반대하였다. 아이젠하워(Dwight David Eisenhower) 미국대통령 후보는 휴전을 공약으로 당선되었다. 이승만은 미국이 휴전해도 북진할 것을 주장했다. 휴전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이승만 대통령은 북한으로 송환을 거부하는 반공포로 석방을 계획했다. 이승만의 지령은 자정부터 새벽 5시 사이에 절묘하게 집행되었다. 한국군은 유엔군 초병들을 감금하거나 무장해제하여 반공포로 3만여 명을 석방시켰다. 이 같은 이승만의 강경한 대응은 미국을 놀라게 했다. 당황한 미국은 이승만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이승만의 휴전 수락 4개항은 1)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2) 장기 경제원조 및 첫 조치로 2억 달러 공여 3) 한국군 증강계획의 지속 4) 한미고위급회담 정례화였다. 미국은 수락했다. 휴전협정이 조인되자 유엔군 사령관 클라크는 “싸워서 이기기보다 평화를 얻는 것이 더 어려웠고, 적군보다 이승만 대통령이 더 힘들었다”고 했다. 이승만은 대한민국의 이익을 위해 우방 미국의 전략을 여러 번 수정하게 했다. 대한민국은 이승만과 미국의 투쟁으로 태어났고 성장했다. 현재 미국과의 동맹이 어떤 효과를 갖고 있는가 하는 것은 대한민국 국민이면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다. 공산주의자들은 이 동맹을 깨야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적화 통일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항상 북한에서는 미군 철수를 부르짖고 있다. 

1953년 미국의 부통령 리처드 닉슨이 왔을 때 이승만 대통령은 닉슨에게 “나는 솔직히 미국으로부터 받은 도움에 진심으로 감사한다. 미국의 정책과 맞지 않는 일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 나는 노예상태의 북한 동포들을 해방시키기 위하여 평화적 방법으로, 필요하다면 무력으로라도 통일을 성취하는 것이 지도자로서 나의 의무라고 생각한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미국의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의 로스코 드럼몬(Roscoe Drummond) 워싱턴 지국장은 “이승만은 정복되지 않았다. 그는 결코 정복할 수 없는 인물이다. 그는 오늘날 극동에서 가장 준비가 잘 되었으며 사기도 충천한 최강의 반공 지도자이다. 공산독재에 끝까지 저항하겠다는 의지는 한국 국민들 사이에 충만해 있다. 현재 대한민국 국민만큼 방공정신이 투철한 사람들은 지구상에 없다. 한국은 서방진영이 필요하고 서방은 한국이 필요하다. 우리를 분리시키려는 어떤 시도도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이승만의 휴전협정 반대 이유가 뚜렷했다. “휴전협정은 전쟁을 줄이는 것이 아니라 더 큰 전쟁의 준비이고 더 많은 고난과 파괴를 의미한다. 전쟁과 내란에 의한 공산당의 더 많은 침략행위의 서막이 된다는 확신 때문에 나는 휴전협정 서명에 반대해 왔다”면서 “이제 휴전이 서명된 이 마당에 나는 그 결과에 대한 나의 판단이 틀렸던 것으로 나타나기만 기대할 뿐이다”라고 했다. 

이승하 목사<해방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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