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학기를 지내자 나는 학교에서 조교 장학금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아내도 능숙해져서 다른 일감도 맡아 더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한국에 있는 딸을 이곳 송 목사의 재정보증을 받고 초청했다. 아내는 먼저 걱정했다. 딸이 오면 미국 생활은 화려하고 아름다운 거로 알 텐데 바닥에서 침대도 없이 이런 매트리스로 생활하는 것을 보면 얼마나 실망하겠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응석이었다. 딸이 온다고 우리가 어떻게 잘 사는 것처럼 거드름을 피울 수 있겠는가? 이제 겨우 숨을 돌리게 해 놓으니 욕심을 부리는 꼴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더 좋은 환경을 달라고 기도하고 있었다. 학교를 매일 통근하는 것도 힘든 일이었다. 또 딸이 오면 대학을 다녀야 할 것이었다. 그러나 내가 다니는 대학촌은 인구도 5만여 명밖에 되지 않았으며 일감도 없는 곳이었다.
내가 다니던 북 텍사스주립대학(NTSU, 현재는 UNT)에는 김 박사라는 한국 분이 오래 전부터 교수로 계셨다. 이분은 대학이 있는 덴턴(Denton) 지역의 미국 교회에 출석하고 있었다. 그는 한국에 대해 알고 싶은 호기심이 많았고 나와는 같은 연배여서 학교에서 자주 만났었다. 미국에서 오래 살면 한국에서 갓 들어온 사람에게 피해를 받을까 개인 정보를 숨기고 산다는데 그는 내가 보기론 전혀 그런 것 같지 않았다.
그는 어떤 한국 사람보다 친절했다. 또한, 남을 도와주는 것을 아주 좋아했다. 그를 사귀어 본 사람은 누구나 영어 잘하고, 미식가이며, 남의 일 도와주길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어느 날 그는 자기 집을 다음 학기부터 반년 동안 우리더러 쓰라고 말했다. 자기네는 집을 하나 새로 샀는데 반년은 매입한 사람이 새집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부담을 갖지 말라고 말했다. 처음에 그래도 되는 거냐고 당황해서 물었지만 싫지 않으면 그렇게 하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희는 복 있는 애 같았다. 우리가 김 박사댁에 이사하기로 한 날 낮에 포트워스(D/FW) 공항에 도착하게 되어 있었다. 우연이었을까? 그래서 우리는 이사를 도와주겠다는 전도사가 빌려온 유 홀 트레일러(U Haul Trailer)에 짐을 실어놓은 상태였다. 우리가 살던 곳은 댈러스와 공항 사이의 어빙 지역이어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딸을 데려올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딸이 오자 우리는 바로 김 박사 댁으로 달렸다. 그래서 딸은 입국하자마자 바로 호화로운 주택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것은 지희의 복이기도 했다. 짐을 풀고 기도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해 주시고 이끌어 주신 것을 감사했다. 지희는 이곳에서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에 가는 것이 좋겠다고 해서 고3, 일학기의 성적증명서를 떼어와서 미국의 12학년에 편입을 시켰다.
김 박사의 부인은 남 돌보기를 좋아하는 분이었다. 아내가 학생 촌에 와서 일감이 없으면 어떻게 하느냐고 애가 타, 매일 신문을 계속 뒤지더니 학교 촌에 있는 ‘러셀 뉴먼’이라는 회사를 소개했다. 이제 아내의 근무지는 그 회사가 되었다. 이번에는 의상샘플을 만드는 회사였다. 디자이너가 디자인한 옷을 만드는 곳으로 공장은 크지 않았지만 여러 가지 기계를 다 다룰 줄 알아야 했다. 아내는 평소에 옷 만드는 것을 좋아하는 성미였다. 그래서 그녀는 그것도 만족스럽고 감사했다. 오랫동안 떼어놓은 딸이 오고 좋은 주택에서 살게 되고, 나는 먼 거리를 통학하지 않아도 되며 조교 장학금도 받게 되어 그때부터는 행복이 시작되는 것 같았다. 하나님은 우리의 응석도 들어 주셨다.
오승재 장로
•소설가
•한남대학교 명예교수
•오정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