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던 것도 싫증나면 바꾸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주부들에게 바꾸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남편과 가구’라고 한다. 농담의 대답에 웃음바다가 된다. 꼭 있어야만 하는 필수품인데도 소유가 되어버리고 나면 시들해지는 것이 인간의 감정이다. 내 아내가 한마디 거든다. “오래된 가구는 다 바꾸었는데 남편은 아직 못바꾸었다”고.
남편과 가구에는 공통점이 있다. 둘 다 모두 말이 없다. 꼼짝도 안 하려고 한다. 때때로 거추장스럽기도 하다. 정감 있는 언어나 감정의 소통을 할 줄을 모른다. 세월과 더불어 낡아진다. 쓸모나 값어치도 떨어진다. 오래될수록 칙칙해지고 매력도 없다. 버리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같이 있어도 매력이 없다.
시인은 <가구>라는 시로 부부관계를 묘사하기도 했다. “아내와 나는 가구처럼 자기 자리에 놓여 있다 / 장롱이 그랬듯이 / 오래 묵은 습관들을 담은 채 / (중략) / 본래 가구들끼리는 말을 많이 하지 않는다 / 그저 아내는 아내의 방에 놓여 있고 / 나는 내 자리에서 내 그림자와 함께 / 육중하게 어두워지고 있을 뿐이다”
시어 속에 담긴 언어에 삶의 생기가 없다. 칙칙하고 무생물 같은 느낌이다. 기대나 기쁨도 없다. 설렘도 없다.
우리 부부는 40여 년 전에 자개로 만든 장롱을 구입한 일이 있다. 내 딴엔 큰 마음 먹고 아내가 원해서 구입했다. 아내는 그 자개장롱을 바라보며 얼마간 행복해하며 즐감했다. 정교하게 표면에 자개로 만든 사람들과 송아지 모양 그리고 각종 동물들을 계수도 하며 마냥 즐거워했다. 그 장롱은 겉모양이 매우 아름답다. 그런데 얼마가 지나더니 시들해지고 말았다. 이제는 별로 관심도 없다. 그렇게 좋아했고 사랑했었는데도 말이다.
접시꽃 같은 사랑에서 오래된 가구와 같이 변질될 수도 있는 게 부부간의 부박한 사랑이다.
내 아내도 나에 대해서 지금은 접시꽃이 아니라 하늘같다던 남편을 목석같은 가구쯤으로 사랑이 변질 된 것 같다. 잘못된 습관에 익숙해지며 헌가구처럼 많은 노부부들이 말없이 무덤덤하게 살아간다. 둘밖에 없는데도 말이다. 살날이 얼마나 남았다고….
남의 말을 들으려 하지도 않는다. 입만 열면 노인성잔소리이다. 그래서 행복해야 할 가정에 웃음이 없다. 냉기가 도는 거실에는 TV 소리만 들릴 뿐이다. 나이가 들수록 아집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옹고집스럽다. 태도와 생각을 바꾸면 지옥이 천국이 된다. 그리고 배우자보다 더 좋은 의지할 사람은 없다. 연륜이 쌓여 오래될수록 정이 들고 의지가 된다.
요사이 건배사로 “오이지”를 외친다 한다. “오해를 이해로 풀면 지금부터 행복”이라는 다짐이다. 광화문 글판에도 올린 장석주 시인의 글이 있다. “대추가 저절로 붉어질 리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천둥 몇 개, 벼락 몇 개.” 지금까지 맞추며 살아온 놈, 천둥 맞고 벼락 맞으며 정으로 농익은 놈이 최고라고 생각하며 지금부터 행복을 위해 “오이지”를 외쳐보자.
나이 들어갈수록 배우자는 더더욱 서로 필요한 존재다. 그래도 믿을 수 있는 놈, 잔소리 해대는 웬수가 최고다.
두상달 장로
• 반포교회
• (사)인간개발연구원 이사장